사과였다.
아니, 장미. 장미였다.
아버지는 많은 규칙을 만드신다. 집에서는 한국말 쓰기, 날마다 일기 쓰기, 책 읽고 아버지한테 줄거리 말씀드리기.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가 정한 주제에 맞춰 글쓰기. 나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건 뭐든, 잘 해내고 싶다. 칭찬을 받고 싶다. 나는 다섯 살이다. 아니 일곱 살이다. 아니 열 살, 스무 살, 아니 서른 살이다.
우리는 작은 집에 산다. 대학원생 기숙사이다. 집은 낡았고, 가구도 낡았고, 갈색 카펫도 낡았다. 소박한 부엌과 거실, 화장실 하나, 그리고 방이 나란히 두 개가 있다. 방 하나는 아버지의 서재다. 아버지는 공부를 하신다. 아버지는 화를 내신다. 아버지는 음악을 들으신다. 아버지는 엄마를 혼내고 나를 혼낸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혼이 나다가 다친 내 몸에 연고를 발라주신다. 아버지는 내가 아침 아홉 시가 넘도록 자는 걸 무척 싫어하신다. 나는 동생이 필요하다.
아버지가 장미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하셨다. A4 용지로 세 장을 썼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커다랗게 번진다. 아버지가 무척 흐뭇해하시며 내게 듬뿍 칭찬을 해주신다. 나는 나를 보는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지면 안도감을 느낀다. 그날의 시험은 통과했다는 만족감이 내 가슴을 다리미처럼 쫙 펴지도록 훑고 지나간다. 이 기분이 내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아버지는 내가 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단층의 아파트 건물 앞 공동 잔디 마당에서 내게 태권도를 가르치신다. 밤이다.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따라서 기합 소리를 낸다. 아버지에게 배운 동작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슈퍼파워가 생기면 좋겠다. 엄마에게 화내고 엄마를 걸핏하면 울게 하는 아버지에게 맞설 수 있는 슈퍼파워가 생기면 좋겠다. 사실 태권도가 싫은 건, 정말 하나도 좋지 않은 건 아버지에게 비밀이다.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왔다. 형제인 아이들이 나를 한참 놀렸다. 동생이 없다고, 더 놀렸다. 나는 울면서 집에 돌아온다. 아버지가 우는 나를 발견한 걸까. 학교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엄마가 이야기를 한 걸까. 어찌 되었든 아버지는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지으신다. 내 두 어깨를 붙잡고 소리 지르신다. 용감! 용감! 용감! 나는 아버지 딸인데, 그러니까 이렇게 바보 쫄보처럼 당하면 안 되는데, 자꾸 눈물이 나고 무섭다. 그래도 아버지가 건네주시는 두껍고 무거운 나무 막대기를 들고나가기는 싫다. 내 팔만큼 긴 그 막대기를 들고 아이들에게 가고 싶지 않다. 웃지 않는 아버지의 표정과 나무 막대기 중 뭐가 더 싫고 불편한지 모르겠다.
나는 동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