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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Jul 17. 2021

38도의 솜털 덩어리가 주는 위안이란

육묘일기: D+2~D+4

D+2

남편은 출근하고 나랑 하루 종일 보내는 첫날. 나는 평소와 같이 일어나 오전 카페인 수혈을 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타서 서재로 출근했다. 스케줄러에 적힌 오늘의 업무 일정을 확인하고 있는데, 발 밑에서 젤리가 삐용빼용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애처롭게 나를 올려다보던 젤리는 본인도 엄마의 손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그 책상 위를 구경하고 싶다는 티를 팍팍 냈다. 분명 이 아이를 내 책상 위에 올리면 나는 이 귀여운 솜털 덩어리를 보느라 아무것도 못하게 될 것을 알았기에 책상 위엔 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1초 만에 무너졌다. 아, 솜털 덩어리처럼 가벼운 내 다짐.


젤리를 들어 올려 내 무릎 위에 올려놨다. 젤리는 무릎 위는 재미없었는지 폴싹 점프해서 책상 위로 올라갔다. 엄마 책상은 어떻게 생겼는지 구석구석 탐험하더니 책상 한편에 자리를 잡고 픽 쓰러졌다. 혹시 몰라 깔아 둔 천 위에 누워 또 꾸벅꾸벅 조는 젤리. 어휴, 너 귀여워서 정말 어!떡!하!지!






귀여워 미치겠는 이 아이를 뒤로 하고 내 시선은 모니터로 향했다. 당일까지 전달하기로 한 건이 있어서 부랴부랴 작업을 끝내야 했다. '전달드립니다.' 메일을 전송하고 젤리를 보는데 마침 잠깐 잠에서 깬 젤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젤리는 내 눈을 바라보며 고양이가 행복할 때 주로 한다는 '가자미 눈'의 형태를 하고 내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게 '미야옹'하며 말을 걸고, 얼굴을 들어 내 입술에 본인의 코를 갖다 대더니 몇 번 킁킁대고선 내 팔에 제 몸을 기대고 풀썩 누웠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적응력이 좋아도 그렇지, 너 이렇게 하루 만에... 


젤리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나의 왼쪽 팔. 내 몸에 기댄 이 자그마한 솜털 덩어리는 너무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며칠 전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이 퇴근하고 올 때까진 이 집에 혼자 있었는데, 갑자기 새근새근 숨을 쉬는 이 생명체와 함께라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행복했다. 어쩌면 이 아이보다 내가 더 온정의 손길이 고팠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 우리 집에 고양이 있어서 정말 좋다.





D+3

새벽 네시 반, 오늘도 젤리는 우당탕탕 침대를 활보하며 우리를 깨웠다. '고양이가 자꾸 깨워요'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을 서너 개 봤는데 아무리 아이가 깨우고 귀여워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해결방안에 오늘은 모르쇠를 시전 했다. 계속 놀자고 깨워도 우리가 반응이 없자 아이도 어제보다는 금방 지루해졌는지 침대 머리맡에 깔아놓은 본인의 담요 위에 올라가 잤다. 역시, 육묘도 공부를 해야 한다.


으, 아침에 생리가 터졌다. 어쩐지 어제저녁부터 온몸이 쑤시고 에어컨 바람에 뼈가 시리더라. 덥고 찝찝하고 축 쳐지고 생리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으니 젤리도 어느샌가 내 옆에 와서 같이 널브러졌다. 사냥놀이도 해줘야 하고 화장실도 치워줘야 하는데 엄마가 힘이 없어서 미안해... 집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벌써 나가떨어진 것 같아서 속상했다.



그래도 잘 땐 꼭 엄마 옆에서



더 신나게 놀아야 하는데 괜히 내가 잠만 자니까 얘도 심심해서 잠만 자는 거 아닐까 신경 쓰였다. 사냥놀이를 많이 해주지 않으면 고양이가 우울해진다던데, 우울한 고양이는 잠만 잔다던데, 얘는 지금 우울한 걸까? 별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이의 손짓 발짓 하나에 롤러코스터를 수백 번씩 타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혹여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가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던데.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마음이 안 좋아 내 옆에 곤히 자는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젤리는 배를 발라당 보이며 골골대기 시작했다. 젤리의 골골 송에 쓸데없는 걱정은 모두 하늘 위로 날아가버렸다. 내 옆에서 자는 것이 꽤나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젤리야, 이따가 아빠가 퇴근하고 오면 더 재밌게 놀아준대, 오늘 하루만 우리 디비 자자.



옆에 담요도 곱게 깔아놨는데 꼭 티슈 케이스 위에 올라가 자리 잡는 얼룩 고영희




D+4

어젯밤의 무반응이 효과가 있던 걸까? 오늘은 안 깨우고 잠잠했다. 몇 번 삐용삐용하고 울었던 것도 같은데 우리가 안 깨니까 본인도 거실에서 혼자 몇 번 뛰어다니다가 밥 먹고 침대 위에 올라와 다시 잤다.

아무래도, 우리 집에 천재 고양이가 사나 보다. 흐흐. (팔불출 X 도치맘)





* 젤리 유튜브 채널: 스윗리틀젤리(Sweet Little Jelly)

* 젤리의 첫째날 적응기 2탄이 궁금하다면 아래의 영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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