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묘일기: D+4~5
큰일이다. 이놈의 귀여운 고영희를 보느라 일을 못 하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하러 책상 앞에 앉아도 온 신경이 아이에게로 쏠린다. 우리의 고양이 친구 젤리는 아직 아기인 탓에 호기심도 왕성하고 여기저기 탐험하느라 바쁘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는 곳은 일단 다 올라가 보고 싶은가보다. 하지만 아직 아기 고양이다 보니 높은 곳에서 착지하는 자세도 불안정해 혹여 잘못 떨어질까 봐 불안하기만 하다. 또 내가 미처 못 본 바닥에 떨어진 먹으면 안 되는 무언가를 주워 먹을까 봐 불안하고, 혹시 어디 낑겨서 못 나올까 봐도 불안하고... 아이가 뭘 할지 불안해서 눈을 못 떼겠다는 말이 딱 맞다.
남편은 그래도 고양이니까 본능대로 잘 착지할 거고, 후각이 발달하여 아무거나 주워 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하지만 본가에 계신 묘르신은 아무거나 잘 주워 먹었는데... 쩝...) 일단 나도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만, 온 신경이 젤리에게 향했다.
젤리와 함께 지내는 낮 시간은 분명 위로가 되었지만, 일과 육묘를 병행하다 보니 금세 체력이 바닥났다. 평소보다 커피 수혈이 더 잦았고, 당충전의 주기가 짧아졌다. 평소엔 모니터에 펼쳐진 영상 편집 프로그램의 캔버스만 신경 쓰면 되었는데, 지금은 동시에 온 집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는 아기 고양이에게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끼 고양이라 수면 시간이 길다는 것. 미친 듯이 놀다가 잠이 오면 갑자기 얼음하고 그 자리에서 픽 쓰러져 잤다. 아이가 곤히 자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평소에 비해) 굼떠있던 마우스와 키보드 위의 내 손이 열심히 날아다녔다.
집에 혼자 있다 보면 내 끼니 시간도 불규칙하고, 귀찮아서 정말 대충 먹는데, 한창 자라나는 아이의 끼니까지 대충 때울 순 없지 않은가. 내 입으로 뭐가 들어가는지 신경은 못 써도, 젤리의 밥은 알람까지 설정하며 때맞춰 채워주었다. 젤리가 밥을 먹을 때면 젤리 화장실에 가서 아이의 변을 일일이 확인하며 화장실을 치워주었다. 건강한(?) 변 상태에 괜히 뿌듯해하며 '내 새끼 건강하네~'라는 혼잣말도 함께.
아, 어쩌면 '나만 생각하던 내 시간'이 조금은 사라진 것도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은 완벽. 나는 안 깼는데 아빠를 종종 깨물었다고 함. 효묘네.
소문난 '명품' 캣타워를 사줬는데 벌써부터 잘 사용한다. 기특하기도 하지. 특히 로열층 스카이라운지와 투명해먹을 매우 애용하는 편. 너무 높은가 싶었는데 그래도 어떻게 잘 올라간다. 역시 맹수...? 사실 스카이라운지는 내 키보다 조금 더 높아 시야가 가려 아이의 모습이 잘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투명 해먹은 말 그대로 '투명'하기 때문에 아이의 모든 모습이 다 보인다. 투명 해먹에 비치는 젤리의 핑크색 젤리는 정말이지... 끔찍하게 귀여워서 말(을)잇(지)못(한다)이다.
캣타워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중에 정말 귀여운 건 내가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밥을 먹거나 책을 읽으면 내 손이 가장 닿기 좋은 천해먹에 드러누워 자는 것. 자는 자세를 바꾸느라 뒤척일 때 종종 눈을 가늘게 떠 내가 옆에 있는 것을 확인하곤 내게 본인의 앞발을 뻗기도 하고, 만져달라고 작게 야옹하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난 또 얼굴에 엄마 미소를 한껏 머금고선 아이의 턱을 만져준다.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고로롱고로롱하며 깊은 잠에 빠진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깊게 잠들었길래 고양이가 싫어하는 양치질을 시도해보았다. 고양이는 구내염에 취약하다. 구내염만 잘 관리해줘도 아이가 커서 병원 갈 일이 적다. 고양이 양치질은 그렇게 어렵진 않다. 고양이가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내가 어렸을 때도 양치질은 왜 이렇게 귀찮고 싫었는지 모르겠다. 딱딱한 플라스틱 막대가 내 입속을 휘젓는 느낌도 싫었고, 뭔가 매운데 일반적인 매운맛은 아닌 조금은 시콤하면서도 알싸한 그 치약 맛도 싫었다. 뭐 비슷한 이유로 고양이도 양치질을 싫어하는 걸까?
본가에 있는 묘르신은 일평생 양치질을 시켜본 적이 없으나 너무나 다행히도 구내염 없이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천운이 타고난 잇몸이고... 이 아기 고양이는 어떤 잇몸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어렸을 때부터 살살살살 양치질하는 습관을 길러보자고 남편이 제안했다. '아, 우리 묘르신은 평생 양치질 없이도 잘만 살았는데!' 하다간 자칫하면 안아키와 같은 사고방식을 탑재할 것 같아 우선 고양이 양치질이 꼭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의 스트레스를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공부했다. 나의 구세주 '미야옹철' 수의사님도 반려묘들을 양치질하는 클립을 보고 고양이용 치약과 정말 작고 부드러운 고양이용 칫솔을 구매했다.
젤리가 턱을 천장으로 향한 채 배를 발라당 보이는 자세로 잠이 들었다. 깊게 잠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이의 입 주변을 살살 만졌다. 젤리는 가만히 있었다. 이번엔 입을 살짝 벌려 송곳니 터치, 역시 무난히 성공. 냄새가 가장 고약하고 집중적으로 양치를 해줘야 하는 곳인 깊숙한 어금니 쪽도 살짝 벌려보았다. 오, 다행히 여전히 꿈나라다. 부랴부랴 칫솔에 치약을 묻혀 찾기도 힘든 어금니를 살살살살 칫솔질했다. 조금 꿈틀거리긴 하는데 도망가거나 하악질하진 않았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잠에 취해서 그런지 어쨌든 수월하게 성공했다.
성취감에 취해 눈꼽 떼기도 도전했다. 눈꼽 떼기는 그렇게 어렵진 않은데, 젤리는 유난히 눈 주변을 만지는 것을 싫어해 매번 실패했다. 아직 아기라 눈꼽이 많이 끼진 않았지만, 아기인 탓에 그루밍이 서툴러 딱딱하게 눌러붙은 눈꼽을 떼줘야 한다. 고양이용 물티슈(그렇다, 고양이를 키우는 일엔 장비가 많이 든다.)를 들고 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꼽이 낀 눈 앞머리를 살살 문질렀다. 진짜 깊이 잠들었나 보다. 오늘은 얌전했다. 이렇게 눈꼽 떼기도 수월하게 성공.
이 기세를 몰아 귀 청소도 하기로 했다. 역시나 고양이 귀 청소 전용 액체(?)를 화장 솜에 묻혀 살살살살 귀를 닦아줬다. 귀 청소를 하기 전 나의 또 다른 구세주 '윤샘'의 고양이 귀 청소 방법 영상을 세 번 돌려보고, 영상에서 시키는 대로 내 손이 닿는 부분만 (면봉을 사용하거나, 깊숙이 손을 욱여넣으면 절대 안 된다) 살살 문질러 닦아주었다. 어휴, 이놈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렇게 곤히 잘 수가 없다. 이뻐 죽겠네.
너의 눈, 입, 귀, 널 만지는 내 손길....
귀를 닦은 화장 솜을 버리고 오자 아이는 어느새 내 손이 안 닿는 스카이라운지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귀찮았긴 귀찮았나 보다. 그래도 다 끝나고 자리 옮겨줘서 고마워. 발톱은 이따가 아빠 오면 깎자. 슬슬 엄마 아빠의 다리에 너의 발톱 자국이 씨게 남기 시작했단다.
* 젤리 유튜브 채널: 스윗리틀젤리(Sweet Little Jelly)
* 젤리의 DAY2 이야기는 아래의 영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