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묘일기:D+9
생각보다 아이의 적응이 빨라 예방 접종을 시작해도 될 것 같아 동물 병원을 갔다. 아기 고양이는 보통 3회에 걸쳐 예방접종을 맞는다. 오늘은 젤리의 첫 번째 접종일. 그동안 열심히 검색해둔 고양이 대기실이 따로 있는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동물병원을 가기로 했다. 젤리는 의외로 이동장에 잘 들어갔고, 이동하는 중에도 굉장히 얌전했다. 덕분에 수월하게 병원을 다녀올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 고양이 대기실에 들어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기하고 있는 고양이들이 좀 있었다. 집사들도 고양이들과 함께 긴장한 탓인지 대기실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이윽고 젤리의 순서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고, 젤리와 수의사 선생님의 역사적인 첫 대면이 이뤄졌다.
- 아이고 예뻐라~ 근데 고집이 좀 있네요
네...? 저희 아이가 고집이요...? 의사 선생님은 젤리를 몇 번 쓰다듬고 코인사를 하시더니 얼추 파악이 끝났다는 듯 말씀하셨다. 웃으면서 말하셨지만 그 말은 전혀 우습지 않잖아요 선생님... 앞날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 말을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아이를 계속 쓰다듬으시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이의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 선생님, 아이는 건강한가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아이 얼굴 보느라 검진하는 것을 깜빡했네요. 죄송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선생님! 인정합니다. 예, 제 아이가 좀 예뻐요. 딱 3등신의 비율인 약 8주의 아기 고양이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내 눈에만 예쁜 게 아니었구나 내 새끼! 이렇게 팔불출이 되어 가고...
- 어 근데, 얘 딸인데요?
어라? 땅콩이 없다. 아들인 줄 알았는데 딸이었다. 암컷의 중성화 수술은 개복이 필요해 수컷보다 조금 더 힘들다고 하던데 벌써부터 젤리가 힘든 수술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걱정됐다. 한편으론 웃음도 나왔다. 일주일 동안 남편과 혀 짧은 소리로 '어이구 우리 아들~'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들은 사람은 없지만 괜히 창피하기도 했다.
순딩이인줄 알았던 내 아들이 알고 보니 고집쟁이 딸이었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했던 유일한 저주(?)가 하나 있는데 바로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였다. 아, 엄마의 저주가 현실이 될 것 같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고집은 셌지만 똑부러졌으니까 내 새끼도 똑부러지겠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자기 위로를 하며 집으로 가는 차 안에 올라탔다.
병원이나 주사를 무서워하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젤리는 주사도 씩씩하게 잘 맞고, 집에 오는 길에도 얌전했다. 남편과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엄마가 옆에 있는지 확인하는 듯 몇 번 야옹거리긴 했는데, "어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라고 말해주면 또 조용했다.
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오늘 하루 정도는 유난히 피곤해하고, 식욕도 없을 거라는 수의사 선생님의 이야기와 달리 젤리는 집에 오자마자 기운이 펄펄 넘쳤다. 이동장 문을 열어주자마자 사방을 뛰어다니며 캣타워에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참았던(?) 사냥 에너지를 뿜어내느라 바빴다. 아, 다만 선생님이 애기 얼굴이 조금 부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일명 뽕주둥이라 불리는 인중과 입 부분이 살짝 부어 조금 맹해 보이긴 했다. 뭐, 그마저도 내 눈엔 너무 귀여웠지만.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젤리의 성별 재판별(?)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깔깔 웃었다. 역시나 엄마는 '잘됐네. 너도 너 같은 딸 키워봐라.'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다음 젤리를 임시 보호해주셨던 집사님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 사실 얼마 전 젤리의 다른 형제 고양이도 입양 간 후에 알고 보니 성별이 달라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젤리에게도 그 일이 일어난 것이라 그 집사님도 엄청나게 황당해하셨다.
수컷이면 어떻고 암컷이면 어떠랴. 여전히 젤리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포근하다. 병원을 다녀와서도 언제 주사를 맞았냐는 듯 활발하게 잘 놀아주어 고마웠고, 밥도 잘 먹어주어 기특했다. 정말 성별이 무슨 상관인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싸고 건강하고 씩씩하고 행복하게만 자라주면 될 일. 어찌 됐든 젤리의 이런저런 해프닝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에 집안에만 박혀있는 우리 가족에겐 전혀 지루하지 않은, 다이내믹한 일주일이었다.
어느새 내 옆에 기대 누워 곤히 잠든 젤리와 덕분에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있는 나의 광경을 보며 남편이 '다정한 모녀네'라는 말을 하고 지나갔다. '다정한 모녀'. 느낌이 묘했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어쩌면 눈물도 찔끔 날 것 같았다. 삼십 평생 모녀에서 내 롤은 딸이었는데, 이제는 모녀에서 '모'를 담당하게 되었다니.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는데, 남편이 지나가듯 툭 내뱉은 말에서 나는 뭔지 모를 모성애를 느껴버린 것이다. 우리 엄마가 모녀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내일 엄마에게 전화해 물어봐야지. 엄마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느냐고. 엄마도 눈물이 찔끔 나진 않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