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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선 Dec 30. 2020

삼요소에서 있었던 일

나선이 쓰는 글

난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지난주 대전 독립 책방 삼요소의 라이브 방송이 있었다. 2020년 연말정산이 주제인 라이브였는데, 이후에 인스타그램에 나의 연말정산 글을 올리면 블라인드 북을 선물한다고 해서 참여했다. 며칠 뒤 DM이 왔고 이번 주에 찾으러 오라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남편이 오늘 점심에 시간이 될 것 같다고 해서 커피도 한잔 마실 겸 오픈 시간인 2시에 맞추어 삼요소로 향했다. 삼요소에 방문한 지가 일 년은 넘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간 건데도 사장님이 나를 알아본 것처럼

"블라인드 북 찾으러 오셨죠?"

하며 블라인드 북 6권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서점 공간의 테이블 위에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박스로 포장되어 있어서 어떤 책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뽑기 하듯이 신중하게 쳐다보다가 가운데 줄에 있는 것을 골랐다. 그리고는 남편과 함께 음료를 주문했다. 음료가 나오는 동안 찬찬히 책 구경을 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관심 가질 만한 책은 이쪽 서가에 있다고 알려줬다. 그는 잠시 몇 권을 훑어보는 것 같았다. 책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이 정도 자극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내적 기쁨을 느낀 후 뒤로 물러나 먼저 자리로 갔다.

테이블엔 커피와 캐모마일 티, 그리고 내가 고른 블라인드 북이 있었다. 나는 포장을 뜯어 어떤 책을 꺼냈다.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였다. 최근에 인친들의 피드에 많이 올라오는 책이라 궁금했어서 너무 기뻤다. 사서 보든 빌려 보든 할 예정이었는데 선물로 받다니. 책 선물은 언제나 기쁘다. 특히나 내가 보고 싶었던 책이라면 더더욱. 나는 책 사진을 찍고 사장님께 꼭 보고 싶었던 책이었다고 감사하다고 말해야지 마음먹었다.


곧 남편이 와서 앉아 차를 마셨다. 평소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많이 피곤한지 자꾸 졸았다. 차에서라도 조금 쉬고 있을래?, 했더니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또 꿈뻑꿈뻑 졸았다. 나는 이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은 글렀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쉬라고 하고 공간에 비치된 독립출판물을 한 권 가져왔다. 김종완 작가의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처음 펴자마자

[신을 믿지 못하겠으면 나라도 믿어야지.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신이라도 믿어야지.]

라는 문장을 봤다. 나는 나를 너무 믿어서 신을 안 믿는 거였다는 생각이 들자 웃겼다. 자기애가 너무 강하면 남을 잘 못 믿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신이 아예 없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 같은데 내가 그를 따르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김종완 작가가 이런 식으로 쓴 글이 너무 좋았다. 몇 장쯤 더 읽고 있을 때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라는 문장을 보았다. '그것이'와 '이상하게'사이에 최소 두 칸 이상의 띄어쓰기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사회적 거리두기 중이라지만 문장마저 거리를 두는 중인 걸까? 잠깐 의아했는데 의도된 띄어쓰기 같다는 느낌이 들어 갑자기 자연스럽게 읽혔다. 그것이 아주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 그것이 한숨 크게 쉬고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을 수도 있지, 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언제까지 해야만 할까. 이 문장 사이가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이미 찍혀 나온 활자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싶어 조금 마음이 아파졌다.

그쯤에 옆 테이블 사람의 음료가 나왔는데, 옆 테이블 사람이 블라인드 북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사장님께 감사인사를 했다. 언뜻 보니 그 책은 <그 좋았던 시간에>였다. 긴가민가 했는데 옆 테이블 사람이 여행 에세이를 좋아한다고 덧붙여서 확신했다. 저 책을 받았더라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장님의 책 선정에 감탄하다가 나도 놓칠세라

"저도 이 책 너무 좋아요."

하고 말해버렸다. 누가 보면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 싶은 초등학생 같아 보였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갑자기 민망해졌다. 괜히 남편하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체했다. 그리고 그는 또 졸았다. 남편이 일하는 동안 잠시 휴대폰을 보다가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봤다.

"여보 나 브런치 작가 됐어!"

라고 생각보다 큰 소리로 말해버렸다. 덕분에 그는 잠이 깬 것 같았지만 나는 방금 전보다 좀 더 부끄러워졌다. 나는 창피해서 괜히 그에게 이런저런 부분들을 고쳐서 작가 신청을 했더니 됐다고 구구절절 말했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다.

나는 서점에서 그 소식을 알았다는 게 좋았다. 어떤 면에서 좋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서점에 내가 쓴 글이 팔릴 수도 있다는 큰 그림? 근자감? 아무튼 신을 믿지 않을 정도를 나를 믿는 나는 생각이 늘 너무 앞선다.

집에 와서 브런치에 글을 두 개 발행했다. 전에 써 둔 글이었다. 구독자가 아예 없는데도 몇 시간도 안되어 조회수가 50을 넘어갔다. 블로그에서는 잘 없던 일이었다. 작가와 독자의 영역이 확실한 어플이라 그런지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 같았다. 밤까지도 내 브런치 계정엔 구독자가 없었는데 블로그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글을 올린 걸 본 한 작가님이 첫 구독자가 되어 주셨다. 나는 이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공식적으로 브런치 작가를 하면서 첫 독자가 탄생한 순간이기에.

오늘은 어떤 책인지 모를 책을 선물 받았고, 그 책이 마침 내가 보려고 했던 책이었고,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내가 왜 신을 믿지 않는지 알게 되었으며, 문장이 거리를 두는 것을 보고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졸았지만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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