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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선 Jan 03. 2021

특별한 날엔 꿈처럼 눈이 내렸어

나선이 쓰는 글

새해를 맞아 2020년을 되돌아봤다. 코로나 19로 인해 바뀐 상황들이 답답해서 힘든 기억만 남을 줄 알았다. 나쁜 기억이 많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좋았던 굵직한 일들이 많이 기억이 났다. 4월엔 우리가 신혼집에서 처음 이사를 했다. 집이 조금 넓어졌다. 또, 독서 온라인 톡방에서 '올해의 베스트 3' 도서를 각자 꼽았는데 내가 뽑은 책 3권 중 2권이 2020년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에 읽은 책이었다. 1월 1일에 읽은 로셀라 포스토리노의[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과 12월 30일에 읽은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 그 사이에 읽은 임솔아 작가의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까지. 처음과 끝이 나름 좋은 한 해를 마무리했다. 최악과 최고의 기분을 함께 느낀 꿈같은 2020년.

최근 읽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나온 구절이 생각났다.
"꿈이란 거 정말 재밌네요. 꿈과 꿈이 동음이의어인 것도 신기하고요. 그러고 보니 영어로도 dream은 dream이군요."

1월 1일 아침부터 눈이 왔다. 12월 31일에도 눈이 왔고, 12월 25일에도 눈이 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화이트 뉴이어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꿈같았고, 꿈같았다. 특별하다고 기억될 만한 날 눈까지 오는 건 너무 반칙인 것 같다. 그럼 정말 세상의 주인공이 나인 것 같아서. 남편은 새해 첫날 내내 애들 썰매라도 한 번 타야 하지 않겠냐고 졸라댔다. 둘째가 졸려서 안 된다고 괜히 내가 나가기 싫은 핑계를 댔다. 둘째는 많이 울다가 낮잠을 잤다. 더 이상 핑계 댈 것이 없어진 나는 아이가 깨고 나서 나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몇 년 전 캐리어를 반으로 쪼개 만든 눈썰매를 창고에서 꺼냈다.

"어디로 갈 거야."

나는 뚱해져서는 물었다. 그는 집 앞 선사유적지로 가자고 했다. 추운 것도 싫고, 썰매 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오만상 찌푸리며 어기적 어기적 나설 준비를 했다. 진짜 가기 싫다, 하면서. 밖은 오전부터 종일 오던 눈이 계속 내리며 켜켜이 쌓이는 중이었다. 그는 애들 옷 단단히 입히라는 말을 한 다섯 번쯤 하고, 장갑과 목도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느라 바빴다. 애들이 아니라 자기가 나가고 싶은 것 같았지만 말은 안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째는 눈을 맞는 게 처음이네."


그랬다. 두 돌이 넘은 지 몇 달 안 된 이 아이는 눈을 맞는 게 처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3년 전에 태어나 그 겨울에 오는 눈이 유모차 커버에 쌓이는 것을 잠시 보았을 것이다. 그마저도 너무 어려서 잊어버렸을 터였다. 그다음 연도 겨울은 대전에 눈 소식이 없어 보지 못했다. 며칠 전 하원길에 맞은 비와 같은 진눈깨비를 제외하면 처음 맞는 눈이었다. 옷을 두 겹씩 껴 입혀 나온 아이들은 뒤뚱뒤뚱 걸었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운동화에선 걸을 때마다 반짝반짝 불빛이 났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밟은 보도블록은 폭폭 들어간 상태였다. 아이들은 사람이 밟지 않은 구석길을 쏙쏙 눌러가며 우리의 뒤를 쫓아왔다. 그 와중에 옆에 세워진 차 창을 장갑 낀 손으로 쓱쓱 쓸어가며 천천히 걸었다.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가 눈이 오는 게 새삼 신기해서 한참을 하늘을 보며 걸었다. 여보, 우리 연애하는 것 같다, 그치, 그런 말들을 하면서.

선사유적지엔 이미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과 그 부모가 몇 있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온 커플도 있었고, 박스를 어디서 구했는지 접어서 썰매 대신 타는 술 냄새나는 어른도 있었다. 애들은 한두 번 썰매를 타더니 남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 근처에서 새로운 눈사람을 만들고 놀았다. 대신에 우리 부부가 썰매를 더 잘 탔다. 내가 남편을 밀어주고, 그가 나를 밀어주고. 추워서 귀찮았던 내가 썰매는 제일 많이 탔다.

"거 봐, 좋을 거라고 했지?"

그가 으쓱했다. 그러네, 좋네. 눈이 계속 내렸다. 귀마개 때문에 모자를 쓰지 못한 나는 머리에 계속 눈이 쌓였고 곧 녹아 젖어버렸다. 그가 한 번씩 털어주면서 귀엽다고 말했다. 그런 순간 정말 세상에 우리뿐인 것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또다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구절이 떠올랐다.
"네가 생각하는 대단한 미래는 여기에 없단다. 즐거운 현재, 오늘 밤의 꿈들이 있을 뿐이지."

그래. 눈 맞으며 아이들이 눈 사람을 만드는 걸 보는 이 밤. 오늘이 중요하지.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계속해서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한참 서있다가 아이들을 썰매에 태워 집으로 향했다. 그는 신호등 어떻게 건너, 저기는 눈 없잖아, 망했다, 같은 말을 내뱉으며 달렸다. 나는 세 사람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다. 잊고 싶지 않은 새해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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