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 안희연
손을 달라고 했더니 손인 척 발을 내민다. 살랑 살랑 꼬리를 흔들며 나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너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영혼이구나. 오늘은 개에게까지 나를 들킨 것 같다.
오늘은 바람도 나를 함부로 읽었지. 머리칼이 흩날릴 때 밤송이처럼 후드득 떨어진 내가 있고.
그것은 감춰 둔. 겉만 뾰족한 알맹이. 나를 줍기 위해 다가가면 저만치 굴러가 버린다.
없다고 믿으면 그만일 조각들이야. 새들이 자유롭다고 말하는 건 인간의 높이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무스는 초식동물이지만 몸무게가 300킬로그램이나 나간대. 온순한 눈망울과 날카로운 이빨을 동시에 가진.
집으로 돌아와 곡차를 끓인다. 물의 색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를 둘러싼 세상의 온도를 살핀다. 내가 나여서 우러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있다고.
빛을 거느린 사람들이 창 밖으로 지나간다. 비밀이야 다시 품으면 될 일. 끓일수록 진해지는 것을 나라고 믿으면 될 일이다.
지금부터는 모든 사랑하는 것을 모과라 부르기로 한다
모든 모과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가지고 있고
계단 끝에는 암실이 있다. 암실 문은 잠겨 있지 않지만
좀처럼 열리는 법이 없다
계십니까
대답 대신 누군가 돌아 눕는 소리가 들린다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
10년을 기른 고양이 얼굴이 불현듯 생각나지 않는 날처럼
손바닥 안의 모과는
꼬리를 자르며 모과 밖으로 도망친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독백을 한다
마음을 쏟는 만큼 모과는 익어가지만
분주했던 마음이 방향을 잃고 주저앉은 뒤에야
모과의 검은 발이 볼일 때가 있다
가까워지려는 의지만으로도 모과는 반드시 썩는다
당신이 모과 너머를 보기 시작할 때 모과는 이미 모과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