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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선 Jan 28. 2021

책 기둥과 배틀그라운드

책기둥, 배틀그라운드 - 문보영

나는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원 안에 있지는 못했고, 상상 속에서 책을 읽지 않는 남자를 위해 책을 숨겼다.

유난히 집안일을 열심히 한 날이었다. 여기저기를 깨끗이 치우고 서점으로 나섰다. 책을 두권 샀다. 안리타 작가 책과 문보영 시인 시집. 문보영 시집은 도서관에서 빌린 것도 있어서 구매한 책과 나란히 두고 같이 읽었다. 나는 [책 기둥]에서 세상 모든 책을 읽으면 읽을 책이 없어질까 봐 책을 안 읽는 사람과 책을 숨기는 도서관이 나오는 시를 만났다. 이렇게 멋진 시상이 있다니.


사람 a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다 읽어 버리면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을까 봐
책을 읽지 않았다
*
도서관도 사람 a를 도왔다
*
책 [ ] 2권, 3권, 4권...
책 [ ] 2권, 3권, 4권...
책 [ ] 2권, 3권, 4권...
책 [ ] 2권, 3권, 4권...
책 [ ] 2권, 3권, 4권...
*
도서관의 모든 책이 2권부터 시작했다
시작을 막는 멋진 책이군
사람 a는 생각한다
*
도서관은 모든 책의 1권을
쇠사슬로 묶어 지하 창고에 숨겼으며
개와 바람으로 그 입구를 지키게 했다
*
도서관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고
*
책을 배불리 먹은 도서관은 조금씩 덩치가 커졌으며
사람처럼 숨을 쉬기 시작한다

-<호신>, 문보영-


나는 얼마 전에 한동안 책 슬럼프를 만났다. 온라인으로 지인에게 책 추천을 부탁했더니 한 사람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를 추천해줬다. 긴 호흡으로 읽어나가야 하는 책이었지만 한 번 천천히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을 빌리려고 도서관에서 매번 서가를 찾았는데, 늘 1권이 없었다. <호신>이라는 시를 보자마자 프루스트의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고 나면 독자가 오지 않을까 봐 도서관이 숨겨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웃었다. 그나저나 도서관이 노파심도 많고 김칫국도 잘 마시네. 정말 사람들이 재밌는 책을 다 읽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누구든 만나 그 재밌는 책 이야기를 하고 나눌 텐데. 지적 소비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식으로 생각을 매듭지었다.

이거 시야?

그가 물었다.

응. 시야. 이런 시도 있어.

시가 아닌 줄 알았어. 재밌네.

너랑 나누고 싶었어, 이 재밌는 시를. 이 말을 덧붙이고 싶지만 그러진 않았다. 어쩌면 이 남자도 자기가 다 읽어버리면 읽을 게 없을지 모르지 않겠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할지 몰랐다. 물론 핑계일 것이다. 좀 전에 읽은 시는 자꾸 사람 a에 누군가를 대입하게 했는데, 나는 그를 몇 번이고 넣어봤다. 그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났다. 너스레 떠는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가 사람 a면 나는 도서관을 해볼까. 그가 읽을 만한 책을 자꾸 숨기는 거지. 읽을 만한 책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냥 1권을 숨기고는 1권이 없는 책이라서 그가 안 읽는 거라고 생각해보는 거지.

문보영 시인의 <배틀그라운드>라는 시집은 동명의 게임을 배경으로 하는 시집이었다. 넓은 맵에서 시작해 점점 좁아지는 원 안에서 살아남는 게임이다. 시를 읽다가 시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책방 사장님께 이 게임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전혀 안 하신다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다.

배틀그라운드에서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사과를 왜 던지는 거예요?

그냥 장난치는 거래요. 수류탄 던지는 연습도 하고요.

그렇군요. 아무 의미 없군요.

게임에선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지만 시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시어는 없다. 사과를 던지는 것으로도 시를 쓴다. 게임 시작 60초 전, 50초 전 급박하게. 사과를 던지고 사과는 던져지고. 나는 이 게임을 하는 그를 또 생각했다. 시를 몇 개 읽고 가만히 책방 전경을 바라보다가 곧 짐을 싸서 나왔다.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나는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보 2km 전방에 내가 있었어.

배틀그라운드처럼 점점 좁아지는 원 안에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면 적이 되어 총을 쏴야 하므로.
그러면 정말 그가 사람 a처럼 책을 읽지 않을까 봐.
내가 도서관처럼 책을 숨길까 봐.
나는 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있는 곳에서 2km 밖으로 나와 

시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현실로 현실로 조금씩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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