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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Aug 21. 2024

지옥철에 탈 수 있게 해 주세요

노들야학 취재기(1)

“서른? 그렇게나 됐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뒤늦게 기자가 된 내 나이를 듣고 경찰들은 놀라곤 했다.


물론 그전에도 늘 일을 하긴 했다. 치킨집 아르바이트, 국어 과외, 영어학원 강사, 이탈리안 음식점 홀서빙, 주민센터 무인발급기 안내 등등… 내 나이를 듣고 커진 눈동자를 보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서른이, 뭐 많이 늦은 나이인가. 일을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란 건 없는거야.’     


그랬던 내가 나이 쉰이 넘어서 ‘일자리’를 처음 가진 사람 셋을 만났다. 셋은 모두 중증 뇌병변장애인이고, 60년대생이다. 이 셋은 올해 1월 1일부터 일자리를 잃었다. ‘서울형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이 폐지되면서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이 일을 구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한 가지 단어를 더 넣어보자. 대한민국에서 ‘중증’장애인이 일을 구하는 건 얼마나 어려울까. ‘중증’이란 두 글자를 추가했을 뿐인데 문장이 품은 현실은 한층 더 착잡해진다.      


우리나라는 왜 장애인이 일하기 어려울까. 그 뿌리엔 복지 시혜주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을 복지 수혜 대상자로만 여길 뿐, 일을 할 수 있는 주체로 보진 않는 거다. ‘노동하다’, ‘일하다’라는 늘 능동형이다. ‘노동 당하다’, ‘일 당하다’는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은 일할 때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적어도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장애인을 사회의 한 주체가 아닌 도와줘야 하는 존재로만 인식하는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은 노동의 주체가 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pixabay

     

물론 주체적으로 노동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말그대로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다 일그러진 뇌병변 장애인은 정밀한 손동작을 요하는 조립일을 할 수 없다. 매일 출퇴근이 필수인 사무직 노동을 수행할 수도 없다.     


이런 현실을 뚫고 등장한게 ‘서울형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다. 한국은 2008년 12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국회에서 비준했다. 그럼에도 도통 장애인 고용률이 오르지 않자 유엔은 2014년 한국에 ‘국가의 인식 제고 캠페인’을 권고한다. 이 권고에 따라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장애인 인권보호 활동을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자리로 만든 것이 권리중심공공일자리다.     


이 사업에 참여한 장애인은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장애인이 가장 잘할 수밖에 없는 일을 일감으로 줬기 때문이다. 바로, 장애에 대해 알리는 일이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왜 좋았냐’고 묻자 세 명의 장애인은 모두 비슷한 답을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이영애 씨)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벌어서 내가 쓸 수 있잖아요.” (홍기 씨)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요.” (김탄진 씨)     


이영애(58)씨는 이 일자리 사업을 하면서 장애 인권 증진을 위한 각종 집회에 참여했다. 홍기(63)씨는 서울시 곳곳에 중학교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장애 인식 개선 강의를 했다. 김탄진(56)씨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만드는 교지 ‘노들바람’을 썼다. 이렇게 일해서 번 돈으로 장을 보고, 가족들에게 선물을 하고, 저축도 했다. 홍기 씨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으로 뭘했냐는 질문에 “그냥 돈 벌어서 먹고 살았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느낀 점들을 브런치에 남겨보려 한다.


-


노들야학 4층 10번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접이식 휠체어에 누워 있는 작은 몸이 보였다. 영애 씨였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 표정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만난 지 몇 십초만에 그녀가 밝은 사람인 걸 눈치챘다. 그녀의 땡그란 눈과, 웃는 모양대로 눈 주변에 잡힌 잔주름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자님, 안녕하세요!” 내게 건넨 인사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활기찼기 때문이었다.     


내가 “예정 보다 일찍 도착했네요”라며 멋쩍어하니, 영애 씨는 "괜찮아요"하고 웃었다. 영애 씨 뒤에는 뒤에는 활동지원사 승하 씨가 앉아 있었다. 혹여라도 내가 영애 씨와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모양이었다.      


영애 씨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었지만 인터뷰 중 대부분의 소통을 기자와 직접 했다. 목소리도 크고 밝은 편이었다.  인터뷰 중 영애 씨의 표정이 가장 밝았을 때는 ‘첫 출근 때 어땠냐’는 질문에 답할 때였다.      


“’나도 드디어 근로자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출근 때 너무 좋았어요. 제가 6시에 퇴근하면서 지옥철 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비장애인들은 지옥철 힘들다고 하지만 전 좋아요. 지옥철에 타면 ‘한 사람의 근로인이 됐구나’란 생각이 들거든요.”     


월~금 평일 오후 2시~9시 사이, 영애 씨는 장애인의 권리를 알리는 일을 하고 월 평균 105만 원의 급여를 받았다. 2021년 첫 급여를 받고는 부모님께 속옷 선물을 해드렸다. 월급을 받으면 차곡차곡 모아뒀다가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를 가기도 했다.     


영애 씨의 목소리가 특히나 더 커질 때는 바로 ‘투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사업에서 영애 씨가 주로 한 일은 ‘집회 참여’였다. “권리중심(일자리 사업)할 때는 주로 이동권 집회에 참여했어요. 저희가 지하철 시위 하는 건 아시죠?”     


인터뷰 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애 씨는 잔뼈 굵은 장애 인권 활동가였다. ‘활동지원사 제도화’ 요구 현장, 오이도 참사 후 본격화된 이동권 시위 현장, 그리고 지금의 전장연 지하철 시위에, 영애 씨가 있었다.     


“욕하는 사람들 많지만 대부분 우리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생기고, 장애이콜택시도 생기고 저상버스도 생겼잖아요. 제가 2002년도에 다닐 땐 엘리베이터 자체가 없었어요. 그땐 (노들)야학에 차로 다니고 그랬었거든요. 그땐 활동지원사가 없었어요.”     


영애 씨의 당찬 목소리에서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저, 삭발도 했었어요.” 정말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누워서 머리털이 깎이고 있는 영애 씨 얼굴이 담긴 사진이 나왔다. 영애 씨는 사진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      


권리중심 일자리사업을 통해 한 일이 뭐가 좋았냐고 물었다. 영애 씨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를 비장애인들에게 알리는 게 좋았어요. 우리도 열심히 살고 있고, 이것도 노동이라고.“     


영애 씨는 마지막 문장을 힘주어서 여러번 말했다. “이것도 노동이다.”     


영애 씨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은 ‘지옥철을 타니까 기분이 좋았어요’다. 영애 씨가 속해 있는 전장연이 지하철 시위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장애인도, 지옥철 좀 타게 해달라는 거다.


사람들은 이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비장애인) 현대인들에게 지옥철은, 정말 지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작게는 불쾌함과 불편함 크게는 성추행과 압사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동 수단에 오르는 과정이 (서울) 현대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연한 일상 속 풍경이 되어야 비로소 '정상적 궤도' 안에서 삶이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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