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태생적으로 게을렀던 것인지 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회피하는 성향으로 바뀐 것인지, 마음 속에서 호기심이나 의욕이 생겨도 내 멋대로 무시했고, 심지어는 해야 하는 일도 제 때 하지 않아버렸다. 그러한 태도는 극히 일부 남아있는 나의 유년기 시절의 사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초등학교 때는 매일 일기를 써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학교였다. 그 덕에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여하간 그 일기는 매주 교장 선생님에게 전달되었고, 시골의 작은 학교였다고 하지만 6개 학년 아이들의 모든 일기장을 읽어보신 후에 교장 선생님은 지금 말로 하면 피드백? 또는 댓글?을 달아주셨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교장 선생님). 일기에 쓰인 장문의 교장선생님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 (두 달간 일기를 쓰지 않은 날짜를 일일히 기록하신 후에)
사람은 해야 할 일을 안 할 때 또는 못할 때가 있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라고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을 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나 이번 계속 일기를 안 쓴 것은 고의적으로 즉 일부러 안 쓴 거나 다름 없다. 그리고 사람은 어떤 일을 한 번 안하면 또 안하게 된다. 결국 습관이 된다 그 말이다. 좋은 습관은 길들이기 어려워도 나쁜 습관은 금방 물들기 쉽다. 너의 나쁜 습관을 이번에는 꼭 없애야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너는 글쓰기 능력이 우수하다. 결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좋은 능력을 썩혀서 되겠나? 이번에 혼 좀 나야겠다. 너의 먼 장래를 위해서..."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학급으로 일기가 돌아왔고, 담임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써주시는 글들이 너무 좋았기에 후다닥 달려가 얼른 일기를 들춰보는데 얼굴이 정말이지 불닭볶음면을 처음 먹어본 사람처럼 순식간에 붉어졌었다(사실 나는 아직까지 그 제품을 섭취해본 적은 없다.) 너무 창피했고 부끄러웠으며 누가 볼까 얼른 일기를 덮었다. 어린 나이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실 그간 일기를 어지간히도 밀려썼기에 교장 선생님께 혼날 것 같다는 짐작을 했었다. 아부와 용서를 구하는 내용으로 노트 한페이지를 채워 일기를 내면서도 내심 긴장이 되었더랬다. 그런데 예상보다 더 큰 리액션이 올 줄이야.. 그렇게 나처럼 일기를 쓰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 교장실에 가서 일장 훈화 말씀을 들었다. 그야말로 면목이 없어서 발끝만 보며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교장실에서 내내 서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 일기만큼은 열심히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미루는 습관이 사라졌다.
라는 결론이라면 이 글의 제목은 나로 인해 쓰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때 뿐이었다. 난 전형적인 MBTI P유형이었던 것이다. 불혹을 바라보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일도, 해야 하는 일도, 심지어 하고 싶은 일도 미뤄버리고 마는 사람으로 자라버렸던 것이다. 지금도 미루고 미루다 아이들이 집에 오기 직전에야 부랴부랴 집안일을 후다닥 해치워버리곤 한다. 그러면서 그래도 하긴 했어 라며 내 마음에 거짓말을 해댄다. 그렇게 다음 날은 올바른 생활을 해야지 결심하고서는 해가 뜨면 다시 반복되는 삶.. 교장 선생님,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습자지같은 여자였나봐요.. 오지게 잘 물드네요.. 그래도 그 이후에 중학교에 입학하여 교내외 글쓰기 대회에서 내 기준으로는 제법 선전을 했었다. 대학교 때까지도 블로그에 일기를 주기적으로 썼었다. 그러다 직장인이 되고 난 후에도 가끔이라도 일기를 썼는데, 언젠가부터 글을 읽지도 쓰지도 않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내가 자꾸 글을 쓰고 싶어진다. 매체가 이렇게 다양해진 시대에 나는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것이다. 이 마음을 먹은 것도 사실은 몇 달 전부터였다.
무엇보다 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이 요즘 들기 시작했다(동기부여가 된 사건들이 몇 있다. 다음 글쓰기는 그것을 주제로 하면 되겠다). 내가 휴대폰이라면 내 인생의 배터리는 아직 절반도 더 남았는데 왜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이렇게 아까운 줄 모르고 노상 놀고 있을까 싶어진 것이다. 나에게 다소나마 관심 분야였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보자. 그래서 뭐라도 써보자 싶은 것이다.
그렇게 몇 년 만에 키보드를 두드려가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더니 어렵더니 쓰다보니 피식 피식 웃어가며 쓰고 있다. 내 유년기가 너무 창피하기도 하고 교장 선생님의 선구안은 대단하셨지만 그것이 성공은 하지 못했다는 슬프고 비참하며 낄낄대는 자조적인 웃음이 나온다.
글쓰는 게 재밌다. 예전 일화도 갑자기 기억난다.
라떼(나 때)는 싸이월드가 정말이지 대세였었다. 어느 날 내가 좋아하고 가깝게 느꼈던 친구가 얘기해줬던 거다. 듣고 야자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덩실덩실 토끼처럼 뜀박질하며 달려갔던 이야기. 나하고는 정말 하아아나도 친하지 않았던 하지만 내 친구와 친했던 다른 반 친구가 내 미니홈피에 매일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왜? 하고 물으니 내 일기가 너무 재밌단다. 심심해서 들어왔었는데 일기가 정말 재밌어서 친하지도 않은데 매일 들어와 일기를 읽는다고 했다. 아 진짜? 뭐야~~ 했지만 그 날 하루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나를 알아봐준 느낌이었달까? 인정받은 기분?? 아주 신이 났었다. 그러고 다음 날 등교를 할 때도 난 그 아이에게 인사는 하지 않았다. 나는 좀 (지금도 그렇지만) 돌아이였다.
여하간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도 과거의 일을 회상하면서도 느끼는 건 그래, 나는 글쓰는 게 좋구나. 그러니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이걸로 담판을 지어보자. 그래서 멋진 어른이 또는 여러 의미에서 부자가 되어보자. 게으름뱅이 인간이 드으디어 정신을 차리는 것일까? 일단은 고무적이다. 지금 이 화면에 박제를 해두어야 다음 글쓰기도 실행에 옮길 것 같다. 주말에 애들을 재우고 하나 더 써보기로 한다.
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