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 Apr 13. 2020

현대 미술관은 서예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서: 한국 근현대 서예전'을 보고.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관에서 올해 첫 기획 전시로 '미술관에 서(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을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기자 간담회를 위해 하루 동안 전시장이 공개되어서 직접 볼 기회가 생겼다. 전시를 여러 번 보고 도록도 살펴본 다음의 간단한 감상 메모.


1. '문자추상'에 관한 확신을 얻다

나는 서양 미술사를 먼저 배우고, 전시도 유럽 미술관에서 훨씬 더 많이 자주 봤다. 그런 다음 한국의 전시와 미술 작품을 보기 시작했는데, 국제적 맥락에서 한국 작품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런 맥락에서도 좋은 작품들이 충분히 존재한다.


그 중 하나로 평소에 관심갖던 것이 이응노와 남관, 김영주의 문자 추상이었다. 1950년대 이후 추상화가 세계적 흐름이 된 가운데, 국내 작가들도 일본을 통해 이를 인지하게 됐다. '앵포르멜을 최초로 수용'한다는 등의 이상한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나는 미술사의 사조를 수입하거나 수용한다는 데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어떻게 작가가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했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문자추상'을 서구 추상의 한국적 재해석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시장에 몇 점 없지만, 이응노의 '생맥'과 '율곡과 이이의 시', 남관의 '겨울 풍경' 등 수작을 보면서 이런 확신을 얻었다. 단순히 문자를 차용하는 수준이어서는 한국적 재해석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문자를 사용한 서구 페인팅도 얼마든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각 언어의 완결성, 독자성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 두 사람이 이를 해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전시엔 포함되지 않았지만 한글을 차용한 김영주도. 


2. '서예'를 현대미술관에서 다루는 방식.


전시장을 둘러보며 1,4번째 전시관은 좋았는데 2,3번째 전시관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1번의 맥락을 좀 더 깊이 파고들어 설명해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런데 2번째 전시관은 1세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나열했고, 3번째 전시관은 2세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나열했다. '서예' 장르 챙겨주기 인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하는 전시 구성이었다. (미술관이 어떤 작가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는 것을 나는 절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누구를 챙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술관이 공적으로 보여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서예를 보여주는 것은 박물관에서도 할 수 있는데, 현대미술관에서 다룬다면 좀 다른 접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전통'이라거나, '서예도 예술이다'라는 구호적인 말로는 설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술가들이 특정 작품에서 어떻게 문자를 접근하고 있는지, 그것이 맥락에 따라 어떻게 의미가 얻어지고 달라지는지 와이드하게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 첫 번째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도록을 읽으면서 '서예가 동아시아의 독자적 전통'이라는 표현에 대한 불편함? 혹은 의혹? 이었는데. 왜냐면 서구에서도 당연히 문자 디자인, 캘리그라피가 있었고 이를 시각 예술의 한 영역으로 보고 있다. 다만 그것에 접근하는 태도가 달랐을 뿐이다. 싸이 톰볼리나 캘리그라피적 성격을 활용한 앵포르멜 작가들을 생각한다면, 독자적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단순히 서예라는 장르를 넘어 그것이 사회적으로 가졌던 의미, 서예가들의 태도, 현대 예술가들의 재해석을 다뤄주는 것이 현대미술관에 어울리는 접근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