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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이방인 Aug 29. 2020

축배를 들자

시련 속에서도 인생을 즐기는 지혜

코로나로 인한 셧다운이 단계적으로 해지되면서 EU 회원국 간의 닫혔던 국경들이 슬슬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더불어 "여행을 떠나려면 지금이 최적기"라는 생각에 미쳤다. 계절 또한 바야흐로 여름까지 흘러와 있었으니 떠나고 싶은 충동이 급 폭발했다.

하지만 간절함과는 달리, 망설임이 발목을 잡았다. 코로나로 인한 불안감과 더불어 희귀종양 질환자라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용 주사를 맞으며 컨디션이 수시로 예고 없이 바닥을 치곤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기가 되지 않았다. 한 주 가까이 시체 놀이하듯 침대 신세였던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난 결단을 내렸다. EU 내에서의 이동에 제약이 풀린 만큼, 우리 부부의 최애 휴가지 중 하나인 이탈리아로, 로마로 떠나자고. 남편은 당연히 염려스러워했다. 집 떠나 아프면 어쩌려느냐는 남편에게 '지금이 아니면 또 기회가 있을까?' 싶노라 했다. 그 이상 설득이 필요 없었고, 여행 중독자인 우리 부부는 이미 굵직한 세 건의 휴가를 코로나에게 강탈당한 상태였기에 순식간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남편은 아내가 코로나 감염 위험군에 속하는 질환자인 만큼 최대한 안전을 기하며 그 어느 때보다 세심하게 우리의 살짝 지각한 '은혼 여행'을 준비해주었다.


주변의 부러움과 걱정을 받으며 찾은 7월의 로마는 뜨거운 만큼 매력적이었다. 아시아 관광객들이 빈 틈을 타 내국인과 타 유럽국 관광객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지만 익숙한 로마의 한 여름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실로 이처럼 빈 로마는 처음이었다. 어딜 가도 관광객 인파가 사라진 풍경에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불편함의 대가치곤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는 이 한산함과 여유로움이라니, 그것도 최 극성수기인 이 시기에!


로마에서만 8박?

로마를 여러 차례 방문했던 우리의 과거사를 아는 일부 지인들은 의아해했다. 우리가 옳았다. 8박 9일의 일정도 2천 년 역사가 숨 쉬는 로마를 원 없이 거닐고, 둘러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래간만에 단 둘이 찾은 로마인만큼 전적으로 우리 원대로 시간을 채울 수 있었음이 매우 뜻깊었다.


특히 이른 아침 고대 로마인들이 닦아놓은 아피아 가도 하이킹, 지인과 함께 찾은 로마 인근 바닷가에서 맞이한 노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될 것임을 확신한다.


아피아 가도를 걸으며 우리는 2천 년 전 고대 로마인들의 숨결과 마주하는 듯 숙연해짐을 느꼈다. 파손되지 않은 채 보존된 구간의 원조석들을 밟으면 그 위로 겹겹이 내려앉은 로마 소나무의 송진이 내딛는 발걸음을 살며시 잡는 듯 끈끈함이 감지돼 묘미한 아쉬움을 남기고 온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길을 걸을 수 있어 무척 행복했음은 물론이다.


이겨내야 할 병을 안고 찾은 바닷가는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섰다. 현지인들만이 찾는 아지트 Singita 해변 바(Bar)에는 코로나 시기임을 잊고 싶을 만큼 생동감과 웃음 그리고 행복이 넘쳤다. 그곳에 당도한 시각의 바다는 태양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별들을 생산해내고 있었고,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잔의 칵테일을 마시며 고운 모래의 촉촉함을 맨발로 만끽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차, 하늘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붉은빛으로 물 들어갔다. 바닷가에서 맞는 일몰에 가슴이 시릴 만큼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당면한 현실 때문에 내 눈 앞 자연이 주는 감동의 무게가 더해졌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수평선 너머로 저무는 해가 물들인 붉은 하늘가로 느닷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징소리가 사무치게 애처롭고, 징한 감동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 속에서 많은 현지인들이 그네들의 삶을 위한 축배를 들 듯 그 순간에 취해 있었고, 그들의 행복이 깃든 모습에 나에게도 행복 바이러스가 전염되어 온 듯 착각이 들었다. 시련 속에서도 인생을 위한 축배를 드는 용기라... 이들은 참으로 즐기며 사는 멋을 알고 있구나!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보낸 은혼 여행은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가족으로 인해 더욱 의미를, 가치를 부여받았다. 약 10년 전 투어를 통해 만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가이드와 그 가족들이다. 코로나로 인해 관광객을 맞을 수 없는 현실 속 잔인한 시기를 맞고 있을 터임에도 불구, 이 찬란한 여름의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용기 있는 이들.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희망을 입고, 웃음을 잃지 않는 그들의 삶을 대하는 자세에 내가 도리어 용기와 위로를 얻고 왔으니 더할 나위 없이 로마행은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로마 휴가 동안에는 컨디션도 나의 간절함을 읽은 모양이다. 날 괴롭히지 않고 집으로 복귀할 때까지 기다려줬으니 말이다.


로마 인연들이 준 교훈을 새기며 극복해내리라는 용기,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으로 견뎌내자, 그 용기와 믿음이 나를 종양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리라.


새삼 인파로 몸살을 앓던 로마, 고대로마의 유물들은 그들을 찾아오던 많은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해진다. 그곳을 삶의 터전 삼고 있는 많은 이들이 코로나가 허락한 한산함을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잔인한 현실에 당면해있음이 헤아려짐과 동시에 로마의 빈 거리가 생소하고 또 서글퍼졌다. 이 도시는 사람이 찾아주는 만큼 빛났던 것이 아닐까?


로마여, 묵묵히 견뎌다오,
다시 축배를 들 그 날까지!



한산한 로마 명소들


* 2020.11

   수필문학작가회 창립 30주년 작품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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