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란 Jul 16. 2021

살고 싶어서 자해한다고

자살의도 없는 자해




2019년 2월, 

KBS 추적60분 "소리 없는 아우성 청소년 자해" 편이 방송됩니다. <풀영상 Youtube>


방송에는 저마다의 특수한 사연을 가진 청년들이 출연해 경험을 밝히고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모두 죽고자 하는 의도 없이 여러 번 자해를 했던 경험이 있거나, 중단한 상태에 있지만 현재까지도 이따금 참기 어려운 자해 충동을 느끼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분들 중 한 출연자의 말이 자살의도 없이 자해를 하는 오늘날의 청소년과 젊은 청년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살기 위해 자해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살려고 자해를 한다니, 자살의도 없는 자해행동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 듣기에는 모순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실태조사에 의하면 한국 청소년과 대학생 연령대 젊은 성인이 한번 이상 자해를 경험한 비율이 무려 20%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국외에서 자해에 대해 수행해온 연구결과를 종합하자, 17% 이상의 젊은층에게 자해 경험이 있었고, 실험적으로 일회성 자해를 한 경우도 있었지만 우울증, 불안 증상이나 특히 어린 시절에 정서적/신체적 학대 피해 등 심리외상(트라우마) 경험을 한 경우에는 살면서 자해를 여러번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살기위한, 자실의도가 없는 자해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비자살적 자해(non-suicidal self-injury: NSSI)로 부릅니다. 





추적60분 방송을 보면 비자살적 자해(읽는 편의를 위해 "자해"로 부르고, 자살의도가 있는 자해를 말할 때는 "자살의도가 있는 자해"로 부르겠습니다.)를 해왔던 청년들의 인터뷰를 자해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년배 청년, 인터뷰에 응한 자해 경험자들의 부모 나잇대 중년들이 자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철이 없다.

정신 교육을 시켜야 한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 나약한 것 같다.

부모님이 물려준 귀한 신체를 훼손하다니 용납할 수 없다. 부모가 호되게 혼내야 한다.


이것이 한국의 현주소이고, 자해를 하는 사람이 일상적으로 겪는 주변인의 반응입니다. 의지하는 또래 친구, 형제자매, 심지어 가장 개방적으로 포용해주어야 할 부모에게도 자해 사실만큼은 알리기 어려운 이유가 엿보이는 반응입니다. 현재는 공동체 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심리적인 어려움에 대해 개인의 정신력을 탓하면서 무조건 터부시하던 분위기에서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자해에 대해서 만큼은 제자리 걸음인 것 같습니다. 일부는 특히 청소년이 하는 자해에 대해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패션(fashion) 자해 


'유행'의 의미를 지닌 패션을 앞에 붙여서, 청소년들의 자해가 마치 또래 사이의 유행같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에는 미숙한 청소년간에 자해가 선동될 수 있고, 번져나갈 위험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2018년 개봉한 김의석 감독의 영화 <죄 많은 소녀>에도 비슷한 맥락의 자해 장면이 비춰집니다. 



영화 <죄 많은 소녀(2018)>



사실 이것은 맞는 말이기도, 아니기도 합니다. 주변 또래로부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받는 청소년기에 일반적인 탈선과 비행, 흡연이나 음주, 이성관계를 시작하는 시기와 방식까지 가까운 친구간에는 닮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문에 자해에 대해서도 가까운 친구간에 서로 영향을 줄 개연성이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건 처음 자해를 시작하고, 나아가 여러번 자해를 반복하는 청소년과 젊은 성인에게서는 깊게 상처 입은 기억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진 속아픈 기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트레스', 그 이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활을 하면서 답답하고 힘들었던 것 - 이런 수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오래도록 누가 자해를 하게되며, 왜 자해를 하는가 알고자 노력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미국에서 자해는 소위 이상행동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현재의 한국이 아직 이 인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독일, 영국 등 주로 서양권의 연구자들이 자해하는 사람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다방면의 방법을 동원해서 연구하면서 알게된 건 자해가 심각한 행동인 것에 비해 무척 흔하고, 특정할만한 다른 중증도 이상의 심리질환이 없는 경우에도 자해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남겼습니다.


자해는 고통스럽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체에 상해를 가하는 자해행동을 반복해서 한다.


학자들은 답을 바랐고, 오늘날에 이르러 그들이 도달한 소기의 결론은 일반적인 말로 풀이하면 가령 이렇습니다. 


생애초기 어린 시절에 부모의 이혼, 사별, 분리(부모 또는 주양육자와 떨어져서 살게 됨), 적대적인 부모의 양육방식, 체벌을 빙자한 신체적 학대, 언어폭력 등 정서적 학대, 방임, (친족)성폭력 등 심리외상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이처럼 차갑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 주변의 폭력성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표현을 숨기고 억제한다. 

감정을 억압하는 방식이 습관화되면 아동-청소년기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바라는 것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교사 및 또래와의 관계에서 쉽게 위축되며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 등 곤란을 겪게 되면 주변 사람을 믿고 도움을 구하는 대신에 압도적인 정서적 고통(분노, 억울함, 수치심, 깊은 우울, 좌절감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의를 전환할 수 있는 자해를 시작하게 될 위험이 높다. 



고통스러운 자해를 왜 할까? 


학자들이 찾아낸 답은 자해하는 사람들의 내면에 신체에 난 상처가 주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자해는 하나의 '수단(too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에서 어떻게 할 도리도 없이 극심하게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감정이 솟구쳐서 완전히 압도되어 버릴 때, 스스로 신체를 손상하면 일시적이나마 '몸의 아픔'으로 주의집중이 쏠리면서 '마음의 아픔'에서는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탈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해 상처가 아프고 덧나거나 흉이 남을까봐 걱정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번에 압도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다시 자해를 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거센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지는 불씨처럼 직접 사용할 수 있고,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게 해주는 자해만한 방편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자해하는 사람이 겪는 감정 경험은 보통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일상 스트레스로 인해 예리한 종이에 손끝을 베는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면, 자해를 할 위험이 높은 사람은 손가락 서너 개가 잘려나가는 정도의 정서적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러니 자해 상처가 아프지만 자해하지 않고 참을 때 지속되는 내면의 정서적 고통보다는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겪고 감정이 극한으로 향할 때 자해를 하면 비로소 숨이 쉬어지고 '시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위험요소가 성성하게 도사리고 있는 세상을 살기 위해서 손목 자해를 하고, 다른 누군가는 책상과 벽에 머리를 찧고, 자해로 난 상처를 일부러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서 고통스러운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주의를 돌리려고 합니다.



이어지는 글을 통해서 자해행동 자체, 

자해와 자해하는 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리고 자해라는 수단이 가진 의미, 

나아가서 자해하는 사람이 자신을 '정말로' 돕기 위한 방법을 다룰 것입니다.


"아파보이는데 도대체 자해를 왜 해?"

묻는다면, 아마 자해하는 사람은 "몰라" 또는 "그냥 이해하려고 하지마" 

이렇게 대답해버리고 말 것만 같습니다.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해야 할 개인적인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많고 길어서 다 얘기하기 번거로운 마음이 짐작됩니다.


그 마음 안을 함께 보고, 더 잘 알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