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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ry Nov 20. 2017

Nature on the table

개인을 위한 아주 개인적인 식탁






  대학교 4학년 마지막 수업으로 들었던 '석고 제형'시간이었다. 주제가 특정 대상을 정해서 그 사람만을 위한 테이블웨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대신 정한 대상의 보편적인 정보를 관찰하고 수집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만의 특유의 특징이나 습관, 버릇, 행동, 취향 등등을 관찰해서 발견한 후, 그 대상만을 겨냥한 아주 개인적인 테이블 웨어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수업시간에 실제 나왔던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면, 친구를 위한 테이블 웨어를 만든다고 한다면 그 친구의 전공이나 관심사, 취향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두되, 아침으로 '써니사이드업'(반숙계란후라이)을 꼭 먹어야 한다든지, 빵을 먹을 때 꼭 계란 노른자에 찍어 먹는다든지, 등교 준비를 하며 돌아다니면서 식사를 한다든지 등등의 개인의 특징을 고려해 맞춤형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적어도 하루정도 따라다니면서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나는 대상으로 '부모님'을 선택했다. 식상할 수도 있는 대상이지만 부모님을 위한 그릇을 언젠가는 꼭 만들어드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그래서 이 '식상하게 느껴지기 쉬운 대상'을 어떻게 하면 다른 친구들의 유니크한 대상들 사이에서도 묻히지 않고 돋보이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부모님과 살았을 적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고향이 전남이라서 학기 중이라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에 엄마 아빠의 하루를 지켜보며 관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첩을 보거나 떠오르는 기억에 의지하며 테이블 웨어의 콘셉트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사진첩을 찬찬히 보다 보니 엄마 아빠의 생활양식이 '킨포크족'과 많이 닮아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마당 텃밭에서 직접 수확한 유기농 채소들로 자연을 그대로 옮긴 밥상을 차리고, 가족들과 다같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며, 이웃들과 건강한 음식들을 나누어 먹는 일상의 소소한 풍경들이 담겨 있는 엄마 아빠의 사진을 보니 새삼 아름다워 보였다.


'친척, 친족 등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인 킨포크(kinfolk)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느리고 여유로운 자연 속의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현상을 말한다. 포틀랜드 특유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Kinfolk life, Kinfolk table



 아빠는 평생 공무원이셨다. 덕분에 부족함 없이 소소하고 평탄하게 살아오다가 내가 고등학생 때 아빠가 주식으로 많은 돈을 잃으시고 가족들이 엄청 힘들던 시절이 있었다. 아빠는 우울증에 걸리실 만큼 심적으로 힘드셨고 우리는 철이 없어서 힘이 되어드리기는커녕 아빠를 더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조금씩 안정을 찾으시며 아빠께서 시작하셨던 일이 마당의 텃밭을 가꾸는 일이셨다. 처음에는 적상추와 고추, 오이가 전부였는데 점점 당근, 파, 토마토, 블루베리, 바질, 호박 그리고 들꽃들까지 하나씩 늘려가시면서 우리 집 마당이 생명의 온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직접 가꾼 밭에서 자란 유기농 야채들을 그때그때 바로 수확해서 먹을 수 있었다.


아빠의 밭에는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바질과 언니가 좋아하는 블루베리까지 합세하면서 '가족의 밭'이 되었다. 이제는 언니나 내가 먹고 싶은 채소의 씨앗을 직접 사서 아빠께 드리기도 한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흙을 고르고 발로 밟는 이 정성스러운 행위에서 오는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연약한 생명력이 주는 소중함들로 만들어진 식탁을 선물해주신 아버지께 새삼 감사함이 느껴졌다. 그 식재료들로 우리를 위해 달그락달그락 분주히 요리를 하셨을 어머니께도 감사했다. 사랑이란 참 신비롭고 거룩하다. 일상으로 스며들어온 사랑을, 보며, 느끼며, 먹으며 자란 나는 그게 감사한 줄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한걸음 물러서서 보니, 그 모든 것들에 감사했다.


흙과 땅과 비와 햇살과 아빠의 손길과 엄마의 마음과 잘 자라 준 식물들에게. 그리고 종종 아빠의 밭을 헤집어놓고 볼 일을 보는 마루와 레오(반려견과 반려묘)의 거름 마저도 감사했다.


 

  

아무튼 아빠는 본격적으 농사를 하시기 시작하셨다. 정년퇴직을 하시고나면 농사를 지으시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빠는 퇴근 후 집에 오시면 피곤하지도 않으신지 마당의 텃밭으로 가셨고, 주말에는 더욱이 텃밭을 가꾸는 일에 전념 하셨다. 그러시다가 제제 작년쯤 키위 농사를 지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골든키위와 그린키위 두 가지 종류를 수확하는 키위 농장을 준비하시더니 지금은 나름 상품가치가 있을 정도로 수확하시게 되었다. 물론 수입은 아주아주 적다. 마당의 텃밭을 가꾸는 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고되고 위험도 따른다. 이제는 식물을 키우는 일이 시간이 남으면 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해야하는 일이 되셨지만 올해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내후년에 더 좋은 열매들을 거둘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농사라는게 그 계절과 그 시기에 꼭 끝내야 하는 일들이 있어서 나중에 하거나 미루거나 할 수조차 없다. 자연이 주는대로 피우고 열매를 맺고 시드는 것을 온전히 받아드려야한다.






 
  그렇게 '킨포크족'을 위한 테이블 웨어를 만들었다. 테이블 웨어로 만들 그릇의 종류를 정할 땐 아빠 엄마의 식습관을 고려했다. 일단 아빠는 변비가 있으셔서 아침마다 엄마께서 직접 만드신 수제 요거트에 텃밭에서 딴 블루베리와 그때그때 집에 있는 과일을 넣어 드시는데, 생과일을 많이 넣어 드시다 보니 큰 요거트 그릇이 필요하셨다. 그래서 종종 팥빙수 그릇으로 사용하던 그릇에 요거트를 담아 드셨던 게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일반 요거트 그릇보다 조금 큰 사이즈로 만들기로 했다.


또 텃밭에 채소들을 키우다 보니 겉절이나, 샐러드 같은 음식을 자주 드셨는데 그것을 덜어 드실 앞접시를 만들고 싶었다. 대신 의미 없는 앞접시가 아닌 엄마 아빠만의 앞접시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의 텃밭에서 자란 야채들의 잎을 따서 책에 끼워 말린 후, 판판하게 마른 잎사귀에 안료(도자기 물감)를 묻혀 접시에 찍어내는 방식으로 텃밭을 그대로 옮겨둔 생동감 있는 무늬를 새기기로 했다. 그리고 새긴 잎사귀의 재배 날짜를 기록해서(예를 들어 '2016.05.20 당근 잎' 이렇게 날짜를 새겨서) 의미도 넣고 싶었다. 그렇게 '아빠의 손으로 재배한 신선한 채소를 엄마가 맛있게 요리하고 내가 만든 그릇에 담아 가족들의 테이블을 완성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접시와 요거트 그릇을 선물해드렸다. 그리고 지금도 시골집에서는 엄마 아빠가 여전히 잘 사용하고 계신다. 가벼워서 사용하기 편리하고 크기도 알맞다고 하시면서 몇 개 더 만들라고 하셨지만 내가 작업에 손을 놓고 있으니 만들어드릴 수가 없다. 


다음으로 사용하시기에 편리하라고 최대한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캐주얼하게 그릇을 디자인했다.

실제로, 예뻐서 구입했지만 사용하다 보면 불편해서 찻장에 넣어두기만 하는 장식용 컵이나 그릇들이 종종 있는데, 그렇게 되면 엄마 아빠께 선물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손이 자주 가고 사용할 때 부담 없게' 만들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도 이런 점이다. 오래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 디자인과 손이 자주 가는 디자인, 보편적이면서 취향을 타지 않는 그런 디자인. 사실 그런 디자인이 가장 어렵고 고난도의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수업시간의 최종 단계가 선물할 대상이 직접 그릇을 사용하는 사진을 찍어오는 것인데 나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있으니 그냥 콘셉트 사진만 찍고 끝냈다. 정작 수업이 끝나고서야 부모님이 그릇을 받아 보셨고 지금까지 사용 중이시만 그 당시 수업의 임무는 다하지 못하였어도 아쉬움이 없었다. 그 수업의 목표는 좋은 학점이 아닌 부모님에 대한 내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욕심 없이 수업에 임했고 대학교 4년 동안 기억에 남는 수업 중 하나가 되었다.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이석원 작가님의 <보통의 존재>라는  책에서는 만약 예술을 하고 싶다면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하게 개입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디자인이든 예술이든 우리가 살면서 받은 영감으로부터 그것들이 편리하게 창조되어 제품이나 작품으로 탄생한다. 그런 영감을 우리에게 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주체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을 둘러싼 가장 큰 환경인 '자연'이 보인다.


또한 예술에서는 자연 속의 작은 원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은 우리의 문화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인류의 탄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수많은 창작물에는 자연 속에서 포착한 점, 선, 면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으로 부터 영감을 받는 북유럽 디자인, 도자기의 볼륨에서 볼 수 있는 선의 예술, 비행기의 유선형,  우리가 지금 읽고 쓰고 있는 글마저도 자연의 부분으로부터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그림 같다'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은 반대이다. 자연에서 그림이 창조되는 것이며, 그 아름다운의 원천 또한 자연이다.









 

글_사진 : 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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