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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ry Feb 20. 2018

홍차와 마들렌

향기는 기억에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감각이다.






전에 사귀던 남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자 친구의 가정은 어려서부터 화목하지 않았다. 가족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했었는데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았다. 남자 친구는 어릴 적 아빠에 대한 기억이 매우 안 좋았는데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빠에 관한 유년시절 한 에피소드에 대해 매번 이야기를 했었다. 원망을 가득 담은 채로. 그래서인지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에 강박 같은 것이 있었다. 결혼을 계획하지 않았던 대학시절부터 '결혼과 가정'이나 '행복한 가정 설계' '유아 교육론'등을 찾아들었었다고 한다. 또 서른쯤 됐을 때는 예비 아빠들과 함께 '아빠 수업'같은 클래스도 직접 신청해서 들었을 정도라면 '완벽한 가정'에 대한 남자 친구의 관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으려나.



남자 친구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여느 때와 같이 영화를 다운로드하여본다며 늦은 시간에 문자가 왔다. 그리고 한두 시간쯤 뒤에 또 문자가 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이라는 영화 알아? 이거 봤는데 마음이 따뜻해졌어. 유정이는 이런 영화 별로 안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남자 친구와 나는 나이 차이가 꽤 있어서 남자 친구가 나를 칭할 때 위의 '유정이는'처럼 동생 부르듯 불렀다.)


나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일 년 반쯤 지났을 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마르셀 프루스트 작가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라는 책을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이 책에 대해서 먼저 소개하자면 소설가 프루스트가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베어 물었는데 그때 났던 향기로 인해 어린 시절 고향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 떠오른 기억과 추억을 소재로 쓴 소설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이다. 그 후 향기로 인해 어떠한 기억이 떠오르는 현상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영화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주인공 '뽈'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난 뒤 엄마 아빠의 안 좋은 기억만을 안고 살아간다.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장면들이 머릿속에 조각조각 흩어져서 남아있는데 그 기억의 조각들만을 믿고 뽈은 사랑하는 엄마가 아빠에게 맞으며 살았고, 두 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그저 이모들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프루스트 부인을 만난다. 부인이 직접 만든 끝 맛이 이상한 허브차와 마들렌에서 나는 향기로 뽈의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찾게 되며 펼쳐지는 내용이다. 향기로 인해 잊혔던 기억의 조각들이 제자리에 맞춰지고 뽈은 진실과 마주하여 오해와 상처를 딛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얻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쯤 되었을 때였다. 울컥하면서 마음 한편이 저려왔다. 남자 친구가 떠올랐던 것이다. 남자 친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라고 표현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일종의 치유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아빠에 대한 안 좋은 기억 하나가(물론 한 가지 일만이 아니겠지만) 어른이 된 그때까지도 남자 친구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기억을 안고 살았을 남자 친구는 이 영화를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왜 그때 마치 공감능력이 1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남자 친구의 감정과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걸까.,


후회했다. 헤어진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그때 '너의 마음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해주지 못했음'에 후회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남자 친구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남자 친구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남자 친구의 상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나와 우리 가족을 항상 부러워했었다. 어느 날은 남자 친구와 같이 우리 부모님을 뵌 적 있었는데 부모님의 다정한 모습을 행복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그럴 때 쓰는 것일까? 부러움과 동경과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그리움에 가득한 눈. 그 눈빛의 온도가 아직도 생생하다.













왜 사람은 늦은 후에야 깨닫는 걸까. 망각의 동물이 맞는 것 같다. 곁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그제야 투명하게도 잘 보인다. 그때 그 마음을 공감해주고 아픔을 함께 나눴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의 '향기와 기억'에 대한 연구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였다. 이별 후 시련의 아픔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던 어느 날이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시작과 끝 사이의 오후 5시경, 마지막 수업을 끝나고 자취방으로 가는 길에 배가 고파서 떡볶이를 사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지 않은 내리막길이었는데 아직 노랗게 물들려면 한참 남은 듯 해 보이는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예쁜 가로수 길이었다. 가을이 깊어져 단풍이 되면 얼마나 예쁠까 생각하며 그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가던 그때였다. 순간 코로 들어오던 계절의 향기가 어떤 기억을 함께 데리고 들어왔다.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나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렇게 훅- 하고 찾아온 기억에 잠시 멍해졌다. 그때를 추억할 만한 게 하나도 없는 그날 그곳에서, 계절의 향기는 잊고 있던 어떤 순간의 기억을 그토록 선명하게 떠오르게 했다. 나는 그날 떡볶이를 먹지 못했고 떡볶이 대신 갑자기 찾아온 기억 덕분에 혼자 방에서 눈물 콧물 다 빼며 울어야 했다.

여름 끝자락과 가을의 시작. 그 계절 사이의 냄새가 불러온 예쁜 기억은 아팠다. 돌아갈 수 없음과 그 허무함이,.


 그 계기로 후각이라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당시 나는 졸업 전시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나만의 이야기를 담은 향기를 주제로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원래가 향수, 디퓨저, 바디 미스트나 핸드크림 등등 좋아하는 향기 제품을 모을 정도로 향기와 후각에 민감하고 관심도 많았던 터라 향기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내용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후각은 기억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감각이다'라는 주제로 개인의 기억을 담은 아주 개인적인 작업을 하고 싶었다. 작업을 이어나가면서 옛 기억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예전에 자주 데이트하던 장소에 다시 가보기도 하고, 사진이나 편지 등 흔적을 찾아보기도 하며 나름대로 온 감각을 동원해 추억하려 했다. 나 자신에게는 괴로운 작업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 주제만큼 깊이 빠져 들만한 주제는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같이 찍은 사진도, 그 당시 주고받은 사랑이 담긴 편지도, 함께 갔던 맛집의 여전한 맛도, 익숙한 거리도 잊힌 기억들을 어렴풋이 떠오르게 할 뿐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온 것은 역시 '향기'였다. 향기에는 그 당시 계절과 공기, 보았던 것들과 들었던 것, 그리고 느꼈던 감정들이 종합적으로 들어있다. 그 모든 시각과 촉각 미각보다도 향기의 힘은 강력했고 '현재의 나'의 기억 속에 존재 조차 몰랐던 추억까지 꺼내왔다. 무방비 상태의 나에게 그렇게 매번 찾아왔다. 마치 서랍 깊숙이에서 언제 잃어버린지도 몰랐던 물건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커피 원두 봉지를 개봉할 때 나던 고소한 콩기름 냄새, 은행 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온 사방이 노랗던 새벽의 축축한 거리의 냄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차 안으로 들어갈 때 나던 그 사람의 향수 냄새,

그 향수 냄새가 특유의 몸 향기와 섞여 잘 어우러져 만들어낸 그 사람만의 고유의 향기, 우리가 자주 가던 식당의 굴국밥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던 따뜻한 밥 냄새, 같이 산책하던 개천의 여름밤의 풀냄새,

그 사람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빨래할 때 듬뿍 넣던 피죤 덕분에 섬유유연제 향기가 진동하던 내 플리스의 냄새, 커피 향이 옷에 베일 정도로 카페에서 오래 머물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코로 들어오던 가을 끝자락의 계절 냄새,

고향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기차에서 내렸을 때 나던 그 지역 특유의 냄새까지.



이 모든 냄새들에 그때의 우리가 살고 있다.

비슷한 향기라도 맡게 되면 그 순간, 그때의 우리는 다시 소환되고 기억되며, 또 그렇게 잠깐 내 마음속에 살다가 간다.


이렇듯 향기라는 것은 같은 향기라도 개인에 의해 다른 기억을 담고 있는 아주 개인적인 다른 향기가 된다.








 

불가리 뿌르 옴므 익스(프래그런스) :투명한 병

겐조 옴므 EDT(EAU DE TOILETTE) :네이비 병

조 말론(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어)


삼나무, 워터민트, 유칼립튜스, 그린페퍼의 청량한 향기.


가을바람 냄새 / 이른 아침과 새벽 공기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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