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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Apr 15. 2022

꿈을 꾼다면 이들처럼

-무명 배우들의 무대를 보며-

  2019년 53회 백상 예술대상 무대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 펼쳐졌다. 영화제인만큼 어떤 배우가 무슨 드레스를 입고, 누구와 입장하며 어떤 작품이 상을 받을 것인지가 궁금한 '레드 카펫'이 상징인 그날엔 수많은 관객들의 환호보다 그 어떤 조명보다 빛나고 눈이 부시는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동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던, 출연했었는지조차 알 수 없던 무명의 배우들이 그날만큼은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으며 무대에 등장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순서가 있었던 것이다. 영화 '아가씨'에서 정신 병동 간호사 2를 맡았던 중년 배우도,  한 컷 등장하는 피자 배달원 역이었던 청년도, 여고생 1을 맡았던 앳된 얼굴의 배우들이 서영은의 ‘꿈을 꾼다’를 마디를 나누어 노래를 불렀다. 프로 가수처럼 수준급도 아니었고, 서로 다른 음색과 음역대로 가사의 한 소절 한 소절 마음을 꾹꾹 담아 부르는 그들은 우리가 소위 존재감 없다고 말하던 무명 배우들이었다. 누구는 수상 소감에서 밥상을 얘기했고, 또 누구는 자신의 수상은 모든 스텝과 배우들에게 돌린다고 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무명 배우. 아니, 영화배우들이었다.   

 많은 영화에서 불량스러운 역할을 도맡아 하던 민머리 우락부락한 배우가 이날만큼은 멋진 슈트를 차려 입고 수줍게 노래를 하고, 드라마에선 매일 청소부 복장만 하고 있던 그녀도 오늘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아마 미용실에서 서먹하지만 예쁘게 화장도 하고, 어떤 게 어울릴까 고르고 또 골랐을 옷을 입고 오늘만큼은 내가 주인공이다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오늘만큼은 이 무대가 내 것이다 즐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을 지켜보는 무대 밑 영화 주인공들의 얼굴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비쳤다. 눈물을 글썽이는가 하면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굳은 얼굴로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을 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 무대 위를 봐야 할지 조금은 당황해하고 난감해하는 모습도 살짝 엿보였다.  

무명 배우를 바라보는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십 년, 이십 년 영화 촬영장을 쫓아다니며 하루 종일 대기하다가 한 장면에 얼굴을 비출까 마나 하는 그들을 보며 나도 너처럼 고생했으니 너도 그만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까? 아니면 너는 외모도 능력도 안 되니 나를 쫓아오려면 멀었다 혀를 차고 있을까? 아니면 기다리려도 기다려도 운이 비껴간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을까?

 무대가 끝난 뒤 위에서 노래를 하던 배우들도 밑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배우들도 모두 뭉클함의 긴 박수를 만들어 냈다. 그들이 없었다면 주연도 빛나지 않고, 그들이 힘내 주지 않았다면 주인공이 빛나지 않음을 알기에 누구 하나 그 무대가 남긴 여운을 쉽게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생계유지가 막막한데도 무대를 놓을 수 없는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부르기만 하면 모든 일 제쳐두고 영화장으로 뛰쳐나갔던 건 포기할 수 없는 '꿈' 그거 하나였다. 아직은 나의 몫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나를 봐주겠지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꿈'이 너무도 열정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무대를 지켜보는 이들이나 무대 위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나 마음은 한결같았을 거다. 그들의 시간과 열정이 너무도 고귀했기에, 그들이 흘린 땀과 노력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꿈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그날, 그 공연장은 숙연했고, 감동적이었고, 슬펐다.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꿈이란 꾸기만 해서도 안 되고, 찾기만 해서도 안 된다. 꿈은 꿈꾸는 이들의 시간과 열정과 노력과 사랑을 먹고 크기에 희망을 낳을 수 있고, 환희를 선물할 수 있다. 그래서 꿈은 더딜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신기루처럼 우리를 현혹시킬 수도 있다. 조금만 가면 될 텐데, 이제 다 온 것 같은데도 도착하면 멀어져 있고, 끝이다 싶으면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 바로 '꿈'이다. 그래서 꿈이 더 고귀하고 그래서 꿈이 더 벅차다. 

내 꿈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쉰이 넘는 동안 나만의 꿈을 찾기나 한 것일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무명 배우들은 말한다. 지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자신들에게 배우는 영원히 불리고 싶은 이름이라고. 무대에 설 때만큼은 무엇보다 행복하다고.


서영은의 '꿈을 꾼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꿈을 꾼다. 

잠시 힘겨운 날도 있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을 향해 나는 꿈을 꾼다

행복한 꿈을 꾼다. 


그들의 미래에 행복한 꿈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내 미래에도 그들처럼 소박하지만 따뜻한 꿈을 꿀 찬란한 그 순간이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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