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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Nov 29. 2017

조엘과 함께 춤을.

천둥번개를 동반한 산발적인 폭풍우가 내리던 날


비가 쏟아졌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산발적인 폭풍우'. 일기예보는 오늘의 날씨를 이렇게 전했었다. 그러니 그날 내가 비를 맞고 돌아온 건 예보를 보지 않은 내 탓이다. 배수시설이 잘 되어있지 않는 아순시온의 길목들은 이미 바다로 변했다.


어렵게 도착한 숙소 앞에서 몇 번이나 벨을 눌렀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와이파이를 잡아보려 애썼지만 그것마저 되지 않자 나는 대문을 부술 듯 두드렸다. 


"뿌에르따! 아브레 뿌에르따! 조엘!" (문 열어!)


정전이었다. 정전은 온 도시를 마비시켰다. 다행히도 내 외침을 들은 호스텔 사장님, 프랑스인 조엘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조엘에게 어설픈 영어와 스페인어로 투정을 늘어놓았다. 한 손으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짓단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홀딱 젖은 머리를 꾹꾹 눌러 짜내며.


"조엘, 밖에 바다야. 거리가 바다라고!"


조엘은 내 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감기 들겠다. 빨리 씻어."라는 걱정을 건네긴 했지만, 꺽꺽거리는 웃음소리에 묻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어두운 화장실 안에서 찬물로 더듬더듬, 대충 샤워를 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에는 2층 침대 두 개가 꾸역꾸역 들어와 있었다. 어둠이 낭창한 방 안에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왔다.


천장으로 막아진 마당 한 구석에 자리한 비루먹은 해먹에 걸터앉아 노트북을 켠다. 어차피 와이파이도 되지 않으니, 노트북을 열고 밀린 일기를 써 내려갔다. 타닥타닥 자판을 치는 소리는 빗소리와 비슷해 제법 화음이 맞다. 젠장, 노트북 배터리마저 간당간당하다. 미리 충전해두지 않은 내 머리를 한대 쥐어박는다.


비를 피해 달아났던 누쉬쉬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야앙-하며 맑게 운다. 전 날 밤 내가 이어폰을 희생해 놀아준 덕에 조금은 마음을 연 모양이다.


호스텔에 묵는 아르헨티나 청년 두 명, 독일 청년 한 명, 그리고 조엘 부부 모두 부엌에 도란도란 둘러앉았다. 이제 이 호스텔 안의 불빛이라곤 조엘이 켜둔 여섯 개의 촛불뿐이었다. 스페인어가 짧은 나는 언제나 대화가 필요한 순간을 피해왔었는데, 전기가 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배터리가 나간 노트북과 없는 것과 다름없는 핸드폰을 닫고 그들 사이에 낑겨앉았다.


갑작스러운 이 폭우와 정전은 남미 여행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에게 더욱 실망감과 짜증을 안겨주었다.




센뜨로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스텔을 운영하는 조엘은 프랑스에서 요리사로 일했다고 했다. 그는 비가 쏟아지자 바빠진다. 마당에 아무렇게나 널어져 있던 빨래를 걷어내야 하고, 건물이 낡은 탓에 여기저기 새고 있는 비를 양동이에 받아내 야하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한지 몇 해가 흘렀으니 이 나라의 지랄 같은 날씨에 대처하는 법은 이제 익숙한듯했다.


정전을 직감하고 냉장고를 살핀 후 대충 재료를 꺼내 점심을 준비한다. 프랑스를 떠나며 샹송을 잊고 요즘은 에스파뇰 노래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호스텔 전체를 울리는 남미 노래에 흥이 올라 그는 부엌 한켠에서 춤을 췄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뚫고 커다랗게 울렸다. 나는 그런 조엘이 좋았다. 


그는 이 일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여행으로 들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고 내게 말했다. 


처음 아순시온에 들어와 이 호스텔을 찾아오기 위해 버스를 탔을 때였다. 내 앞에 앉은 10대 소녀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잠시 뒤, 버스에 올라 잡동사니를 팔던 어린 소년은 그녀의 핸드폰을 낚아채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린 소년은 도망갈 생각이 없어 보였고, 어린 소녀도 머리를 감싸며 탄식했으나 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 도시가 무서웠다. 내 품에 들어있는 여권과 지갑,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얘기를 처음 조엘에게 했을 때 그는 그저 웃으며 조심하라는 말만 건넸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비상전력을 켜거나 전기를 고치는 노력 대신 촛불을 가져와 불을 밝히던.


빗소리와 음악소리 속에서 춤을 추는 조엘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은 충분히 따듯했다. 쏟아져 내리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산발적인 폭풍우'도 그의, 나의, 우리의 행복에 흠집을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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