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꿈이었던 여행. 안녕, 내 꿈같았던 여행.
2016.04.18~ 2017.7.11. 세계일주 D+450
세계일주의 마지막 도시였던 LA를 끝으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의 여행이 (잠정적으로) 끝이나 우물 속에 들어왔다.
우물 속에서는 원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엄마표 한국음식을 매니끼에 먹을 수 있고 새벽에 문득 답답함에 잠에서 깬다면 주저 없이 편의점으로 나가 라면 한 사발을 먹고 돌아올 수도 있다. 외롭다고 느껴질 땐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밤새 칭얼댈 수도 있고, 심심하다 느껴질 땐 동네에 사는 친구를 불러내 집 앞에서 커피 한잔으로 몇 시간을 떠들 수도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밤이 깊어서야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재미없는 일상일지라도 주스 하나를 사면서 벌벌 떨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옆에서 평온히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콩이가 보고 싶다며 울 일도 없을 것이다.
여기는 드디어 우물 속이다. 평범하고 지루하지만 날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당연하고 보통인 것이 가득한.
나가 있는 동안 행복했고, 돌아왔기에 비로소 따뜻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한 말인데, 귀찮은 일 많지만 재미있고, 편하지는 않지만 즐거운, 꿈과 현실이 만났던 순간들이었다. 나의 짧은 26년생에서, 내가 가장 나일 수 있었던 시간들. 매일매일이 나로 가득 찼던 잊지 못할 빛나는 그 날들.
고생했어, 잘했어. 예뻐, 수고했어.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티비를 켜 야구를 보는 것이었다. 못본새에 유니폼이 바뀌었다.
내가 이틀 뒤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던 엄마는, 느닷없이 집에 들어앉은 나를 보자 우스꽝스러운 보자기로 머리를 둘러싼 채 소녀 같은 비명을 내지르셨다. 자식새끼 하나 보고 거진 서른 해를 살아왔음에도 곧 돌아올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퇴근 후 미용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집의 내부는 가구며, 구조며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사를 하고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집 앞에 8500 원하던 치킨집은 옷가게로 변했고, 작은 카페는 인형 뽑기 방으로 탈바꿈하였다. AI로 난리가 났던 통에 치킨집이 많이 망했으며, 요즘 한국은 인형 뽑기가 유행이라 했다.
아, 내가 잠을 참 오래 잤구나.
아, 나는 긴 꿈을 꾸었구나.
배낭을 풀어 서금 서금 한 옷가지들과 때 국물 흐르는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있자니 내 물건들이 이리도 낯설다.
어느 쪽이 꿈이었을까.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사실은 너무 포근하여 깨고 싶지 않았다.
응당 그것이 꿈이었기에, 나는 하늘을 날았고, 우주를 보았고, 물속에 살았고, 사랑을 했다.
마침표가 없을 것 같던 지리멸렬한 하루들이었다.
최형우가 또다시 적시타를 때려냈다는 격앙된 해설자의 목소리와 함께 미몽에서 빠져나온다. 주말이면 엉덩이가 까매지도록 앉아있던 갈색 가죽소파 위다. 새로 바뀐 기아의 유니폼이 썩 마음에 차지 않는다. 오래된 선풍기가 탈탈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허물없이 허물어지는 무더운 여름밤이었다.
서울은 무섭게도 비가 내린다.
나의 이 짧았던 장마철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