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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Dec 10. 2024

01 나의 감정

나에겐 없던 키워드

01 

학창 시절 배웠던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점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글쓰기 강연을 듣다가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 독자가 있으면 에세이고, 독자가 없으면 일기다.

2. 묘사와 설명으로 문학적 서사를 주거나 정보를 준다면 그것은 에세이다.

3. 나의 환경이나 사건에 대해 감정을 토로하는 글쓰기는 일기다.


02 

3번까지 쓰다가 문득 깨달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내가 어릴 적부터 일기를 너무 싫어했던 이유가 이거구나. 감정을 토로하는 일이라서. 내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하는 일이라서.'


03

일기를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던 탓에 늘 방학숙제를 몰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렇게 휘갈겨 썼던 일기는 보기도 싫어서 다 버렸기 때문에 제겐 학창 시절의 일기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지 도무지 떠올려지지 않습니다.


04

직장인이 되어서도 별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업무노트는 몇 장이고 쓰는데 일기는 꾸준히 쓰기를 실패한 적이 벌써 여러 번. 그래서 최근 몇 년간은 비싼 다이어리를 산 기억이 없어요. 스스로 사놓고 후회할 걸 알거든요. 매일이 체크리스트처럼 쓰이고 맙니다. 하루하루가 파편처럼 흩어집니다. 제 서랍엔 스케쥴러는 많고, 일기장은 하나도 없습니다.


05

그렇게 살다가 최근 들어서 이상한 일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불연성, 가연성 인간을 넘어 자연발화 인간으로 불리던 저였는데 마음에서 뜨거움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죠. 이건 정말 큰일입니다. 원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런데 예전과 너무 다릅니다. 예전 같았으면 쉬웠을 일들이 퍽 힘이 들고, 열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변했다는 것이 너무나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어요. '저 왜 이러는 걸까요?'


06

그러다 최근 몇 달간 많은 이야기를 나눈 지인 분이 힌트를 주었습니다. '예지 님은 예지 님의 감정을 너무 안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타인이나 주변 상황엔 굉장히 예민하게 촉을 세우는데, 유독 자신의 마음엔 둔감하네요. 이렇게는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오래 하지 못할 거예요.' 실로 정확한 분석이었어요. 돌이켜보니 직무 검사에선 마음인지력을 가장 보완할 점으로 진단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땐 뭐 그럴 수 있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그러면 '정말'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07

평생 저는 감정이 저의 큰 약점이라는 사실로 스스로를 자책하며, 이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물론, 당연히도 잘 안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전략이 될 리가 없었어요. 원래 사람은 강점을 타인보다 더 잘 쓰고, 약점은 타인보다 잘 못 쓰는 것인데 제 약점을 강점처럼 쓰려고 한 꼴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감정은 늘 일하는 제겐 큰 숙제였고, 짐이었고, 죄책감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더 알아가려고 하지 않았겠지요.


08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하고 이직하는 과정에서 저는 당장 코앞에 어떤 기회들이 펼쳐져 있는지만 생각했을 뿐,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마음속 큰 부분이 힘들어 퇴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힘든 자리를 더 바쁜 것과 더 많은 인사이트로 채우면서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들어온 직장이 순탄할 리 없었습니다. 많이 반성했습니다. 스스로의 감정 표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지금 이렇게 후폭풍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09

요즘 제가 연습하는 것은 불쑥 떠오르는 감정을 잘 포착하고 그에 맞는 이름을 지어주는 일입니다. '생각'보다는 '감정'을 먼저 포착하는 연습을 합니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유추하기보다 저 스스로의 감정을 붙잡고 오래 궁금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그 긍정적인/부정적인 감정의 너머에 숨어있던 진짜 내 마음이 보입니다. '사실은 너 이렇지?'하면서 툭 튀어나올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저를 잘 모르니까요.


10

저에겐 평생 없었던 키워드, 감정을 깊게 길어올린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감정이 나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를 알기 위한 일들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만 같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숙제를 하나씩 풀어가야겠죠. 힘이 들땐 주변 사람들에게 힌트를 구하고,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혼자 붙잡고 힘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돌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연말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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