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나쁜 카피라이터의 독서기
독서환경에 관해서라면 나는 삼면이 책으로 둘러쌓인, 사시사철넉넉한 독서감들이 쏟아지는 천혜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다. 집은 거실 한 면이 모두 책장이고, 방 한 칸은 도서관처럼 방을 가로지르며 책장들이 있다. 침대는 옆에 책을 둘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각종 책들이 겹쳐지고 쌓이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365일을지키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새 책들이 배달되어 온다. 종종 읽은 책을 정리해서 중고 장터에 내놓지만 새 책이 쌓이는 속도에 비해 그 속도가 턱없이 느려 우리집에는 지금도 책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종종 서점에서 파격적인 세일을 할 때면, 누군가 추천해준책, 살면서 한 번쯤은 읽어야할 책, 인생의 필독서, 교양인의 바탕이 되는 책,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데뷔작, 교과서에 나왔다는 이유로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책, 모두가 읽었지만왠지 나만 안 읽은 것 같은 책, 언젠가는 꼭 읽을 것 같은 책 등 각종 책이 각종 이유를 달고 결제되어우리집에 도착한다. 천혜의 환경이라는 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물리적인 환경 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적 환경에서도 나는 천혜의 환경을 누리고 있다.
남편은 아침에 눈뜨자마자 몸도 일으키지 않고, 안경도 안 낀 채로 침대 옆에 있는 책부터 펴는 사람이다. 책을읽다 좋은 부분이 나오면 꼭 내게 읽어준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그 책을 정리한 글을 써서 내가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남편과 나의 책 취향은 꽤 다른 편인데, 내가 남편의 관심분야에 무관심한 것과는 달리, 남편은 내 관심분야에도 관심을 놓치지 않고 괜찮은 책이 나왔다는말을 들으면 꼭 선물로 사서 준다. 간혹 내가 남편 분야에 관심을 보이면, 남편은 입문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책까지 차근차근 선물해준다. 자부한다.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책 친구를 나는 가지고 있다.
이 환경은 회사에서도 계속되는데, 10년 넘게 한 팀에서 일하고 있는 박웅현 팀장님은 좋았던 책이 있으면 꼭 권해주시고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신다. 그분의 독서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편에 비해 팀장님과는 관심분야도 꽤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읽게 되는 일도 한 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팀장님과 나는 서로 읽고 좋았던 부분을 정리해서 교환한다. 신기하게도 같은 책을 읽고도 좋아하는 부분은 꽤나 달라서 팀장님이 내게 보내주시는 요약본을 보면 새롭게 그 책을 읽는 느낌까지 든다.
그뿐만이 아니라 좋은 책이 있으면 내게 무심하게 선물해주는 선배도 있고, 책 이야기로 술자리를 꽉 채울 수 있는 친구도 있고, 어쨌거나 인간관계적으로도 나는 천혜의 환경을 누리고 있다.
문제는 그 천혜의 환경 한 가운데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책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넘쳐나지만기억력이 턱없이 딸리는 내가.
소설 '분노의 포도'를 팀장님이 읽으시곤 “그대화가 핵심인 것 같아. 가게주인이 사탕을 애들에게 10센트에두 개를 주는데 그때……(실제 어제의 대화다)”라고 대화를할라치면 나는 멍한 눈으로 팀장님을 바로 본다. 그럼 팀장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렇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 모두 나를 포기 하지 않았다. 끈질기게도. 나는 이미 나를 포기했는데 말이다.) 그 부분을 책에서 찾아서 보여주시지만, 역시나 나는 곤란하다. 내게 그 책은 어떤 부분이 좋았던 책이라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그러니까‘어떤’이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희뿌연 구름처럼, 뭔가, 어딘가, 좋았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라는 느낌만 막연하게 기억나는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책을 읽는다. 기억도 못할 거면서. 가까스로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해낼 거면서. 심지어 그 사실조차도 까먹을 거면서. 나는 계속 책을 읽는다. 수 백 권의 책을 읽고 단 열 권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가까스로 기억해내는 몇 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이 주는 울림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울림이기 때문이다. 그 책들 때문에 알지 못하던 세계로 연결되었고, 그 책들 때문에 인생의 계획을 바꾸기도 했다. 그 책들 때문에 회사가는 일까지 즐거워졌던 아침이 있었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기억난다.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이 책들 덕분에 잠깐동안이라도 변했던 나는 기억난다. 그게내가 책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의 어쩌면 전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책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머리 나쁜 카피라이터가
겨우 기억해낸 몇 권의 책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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