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낡은 벽을 기록하다
처음부터 의도는 없었다. 의도가 있었다면 이토록 성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늘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멀리서도 보였고, 다가갈 수록 가슴이 뛰었다. 찍고 나면 그토록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랬다. 기분이 너무 좋아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곰곰히 생각하다 보면 그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실했다. 좋은 기분을 위해 성실했다. 아니, 어쩌면 성실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을 따라갔을 뿐이다. 마음의 움직임에 몸의 움직임을 맡겼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에게는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도시들의, 수많은 벽의 기억이생겼다.
가족들과 함께 중국 하이난에 여행을 갔을 때였다. 느지막히 일어나 리조트의 조식을 먹고, 누군가는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틀만에 그 모든 것이 지겨워져버렸다. 새하얀 이불 대신, 잘 차려진 조식 대신, 느긋한 수영장 대신, 그러니까 일상과는 동떨어진 그 모든 것 대신, 진짜 인생이 필요했다. 서울의 일상을 탈출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쨌거나 나는 그랬다.
리조트 카운터에 가서 이 마을의 중심가는 어디냐 물었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부탁했다. 택시 기사에게 지금 말한 그 곳에 나를 데려다주라고 말해달라고. 그렇게 리조트를 탈출했다. 그제서야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택시기사는 커다란 백화점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미련도 없이 백화점을 등지고 길을 건넜다. 더 골목으로 더 골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슴은 더 두근두근거렸다. 아니,행복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보석들이 널려있었다. 그러니까 누구의 눈에도 안 보이지만 내 눈에는 보석처럼 보이는 낡은 벽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타났다. 낡을수록 더 예뻐보였다. 닳아서 원래의 색이 뭔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면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이 색 위에 이 색을 쓸 생각을 했지. 우와 저 걸레랑 저 벽이랑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지.’ 리조트 조식은 깨작거리던 내가, 길바닥을 주방 삼아 커다란 무쇠솥에 끓여내는 정체불명의 국물에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내내 바다를 보며 책만 읽고 음악만 듣고 무표정하던 내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 인사를 하고 있었다. 리조트에서는 별 사진도 안 찍던 내가, 그 골목 안에서는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벽중독자에 가까운 내게 가장 완벽한 한 도시를 꼽으라면 포르투갈 리스본을 꼽을 것이다. 리스본에서도 알파마지구를 꼽을 것이다. 1755년, 27만 명의 리스본 시민 중 무려 9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리스본 대지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언덕 위의 동네, 알파마지구.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들 앞에서 지도는 무기력해지고, 목적지를 바쁘게 향해가던 관광객들은 길을 잃는다. 한 골목이 수갈래의 길로 불친절하게 나눠지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어떤 법칙도 없이 교차된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것 같은 길로 노란색 전차가 달리고, 그옆으로 색색의 빨래가 널려있고, 전깃줄이 지나간다. 낡고, 좁고, 바랬다. 그리고그 낡고 좁고 바랜 것들이 모두 화려하게 빛난다. 눈 앞에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알파마의 실핏줄들이기어이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도. 고맙게도.
알파마 지구에서 내가한 일은 없었다. 다만 헤맸다. 끊임없이 헤맸다. 때론 목적지가 있었지만, 한참 헤매다보면 내가 언덕의 맨 꼭대기에도착해있었다. 온갖 벽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찍고 돌아서면 뒷벽이 말을 걸었다. 오른쪽으로 틀면 왼쪽 벽이 말을 걸었다. 방금 지나갔던 그 벽이 이번에는 햇살을 머금고 말을 걸었다. 어젯밤에 분명 찍었던 벽이 오늘 아침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집 앞 슈퍼에 갈 때에도 카메라를 들고 갔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필름 카메라였지만 언제 또 보물이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줄 모르니까. 그때 카메라가 없으면 정말로 큰일이니까. 나는알파마지구에서 벽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만면에 미소가 돌았다.
남들은 그런 사소한 취향따위, 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나의 이 취향이 도시의 속살로 직행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어떤 취향은 능력이다. 여행지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잘 관리된 유적지의 벽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관광객들이 그 앞에 서서 수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탓에 그 벽은 매끈하고 가지런하고 언제나 화장을 한 상태이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예쁜 벽을 찾고, 그 벽을 따라가다보면 필연적으로일상에 도착한다. 벽들을 따라가다 예기치 않은 공연을 보기도 하고, 낯선 이에게 술을 얻어먹기도 한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가득찬 바에 도착하기도 한다. 그들이 매일 들락거리는 식당 귀퉁이에 우리의 자리가 마련되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가이드북보다도 낡은 벽이 나에겐 가장 훌륭한 가이드가 된다.
좋아하는 것이 뚜렷하다는 사실이 때론 다른 여행을 선물한다. 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사는 동네를 사랑하게 된 것도 낡은 벽들과 오래된 골목들 덕분이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그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낸 색감과 질감을 좋아한다. 그걸 찾기 위해 기꺼이 헤맨다. 헤맬 때마다 보석이 내 손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차올라 목끝까지 간지럽힌다. 그렇게 행복한 감정으로 길을 걷노라면 또 다른 것들이 보인다. 낡은 벽을 좋아하는 낡은 내가 좋다. 그런 나라서 나는 쉽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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