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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익준 Jan 12. 2019

여는 이야기

실수령액 300만원. 결혼하고 혼자 벌어도 그 정도면 부족함 없이 산다고 들었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다. 그날부터 나에게 300만원은 성공한 어른의 상징이었다. 


당시 카페 화장실을 닦고 오전 내 일하면 한 달에 50만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을 받았다. 그런데 편한 사무실에 앉아서 300만원이라니. 꼭 앉아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취업을 했고, 몇 년간 매일 야근을 했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귀가하면 택시 창밖에서 새카만 한강이 반짝거렸다. 강 건너 건물에는 대부분 불이 꺼져있었는데, 조용히 잠든 도시를 바라보면 오늘도 남보다 덜 잤다는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금방이라도 이륙할 기세로 달리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종종 택시 영수증이 100개쯤 쌓여있는 책상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300만원을 가질 수 있겠지. 라고 되뇌면서.


점점 택시 영수증 개수는 무의미해졌다. 택시 탑승 횟수와 노력의 양은 비례하지 않았으니까. 야근은 습관이 되었고, 회사는 가야 하니까 가는 곳이 되었으며, 매일 취침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이래서는 300만원을 모을 수 없겠다 싶어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이 많았다. 이 질환에 대해서 어떤 사람의 댓글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느낌'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얼마 후 회사생활을 정리했다. 간단히 사직서를 작성했다. '개인 사유로 인해 00월 00일부로 퇴사를 요청 드립니다.' 5년간의 직장 생활은 한 줄로 정리되었다. 


근무 마지막 날의 아침과 밤은, 어제와 같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내일도, 다음 주, 내년까지 무한히 이어지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두근대는 마음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어둠이 따뜻하게 느껴지다니, 진작에 이런 어둠이 필요했다. 잠시 마음을 감출 수 있는 완벽한 어둠. 


우리는 세상 앞에서 작고 무력하며, 쉽게 도망칠 수 없지만. 잠시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는 있다. 세상이 방심한 틈을 타 도망쳐온 당신에게 이 쓸쓸한 이야기가 도톰한 이불이 되어주길 바란다. 누구나 가끔은 조용하고, 어둡고 싶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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