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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un 14. 2024

<원더랜드> 죽음 앞에 백전백패인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

인공지능(AI)의 발전을 바라보는 인류의 시선은 양가적이다. AI가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게 아닐까라는 두려이 공존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인공지능 개발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는 오픈AI와 구글 딥마인드의 전·현직 직원 13명이 AI의 위험을 경고하는 공동성명을 냈다’는 기사가 떴다.      


마이클 베이와 같은 ‘파괴지왕’ 감독이라면 이러한 불확실성을 스펙터클한 장면 연출로 도배했을 것이다. SF 장르에 최적화된 감독이라면 과학의 미래를 심각하게 근심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가족의 탄생>(2006) <만추>(2011), 단편 <달려라 차은>(2007) 등을 통해 소통의 기적을 섬세하게 파헤쳤던 김태용 감독이라면? 예상대로, 그가 연출한 <원더랜드>의 방점은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에 찍혀 있지 않다. 그의 시선은 AI가 가져온 관계의 변화 속에서, 기계와 소통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      


죽은 사람 혹은 의식불명으로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원더랜드’ 서비스가 일상이 된 세상이 배경인 영화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담겼다. 어린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감추고 싶은 바이리(탕웨이)는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영상통화 서비스 ‘원더랜드’에 가입한다. 스튜어디스 정인(수지)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연인 태주(박보검)를 우주인으로 복원한 ‘원더랜드’ 서비스 덕분에 슬퍼하지 않고 일상을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원더랜드’ 시스템의 수석 플래너인 해리(정유미)와 신입 플래너 현수(최우식)는 서비스 이용 고객들의 만족을 위해 애쓴다.      

AI 영상통화 서비스 ‘원더랜드’는, 죽은 자를 홀로그램으로 복원해내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2017)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프라임’을 연상시킨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2014)에서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졌던 AI 운영체제(OS)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먼 친척뻘로 보이기도 한다. 원더랜드에 들어간 망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설정에서는 <트루먼 쇼>(1998)와 닿아 있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2001)의 담담한 정서도 떠오른다.      


‘원더랜드’에 복원한 인공지능 부모님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해리 에피소드는 감독의 2006년 작인 <가족의 탄생>의 새 버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해리가 현수를 소개하며 모니터 속 AI 부모님과 마주하고 식사하는 장면은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라는 식구(食口)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혈연 너머’ 관계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물었던 감독의 시선은 ‘인간 너머’ 가상의 인격으로 확장됐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가짜를 진짜처럼 믿으며 사는 해리는 ‘바이리 딸’의 미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에피소드가 서로를 보완했던 <가족의 탄생>의 전법이 겹치기도 한다.      


말하고 싶은 건, 여러 영화가 짜깁기 됐다는 게 아니다. 묵직한 문제의식을 지녔던 영화들과 공명하며 <원더랜드>는 다양한 철학적 질문을 품는다. 인간은 왜 죽을까. 죽은 후 어디로 갈까. 남은 자의 슬픔은 어떻게 흩어지나. 어떻게 잊나. 아니,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게 가능할까. 인공지능으로 맺은 관계는 진짜라고 할 수 있나. 그렇다고 인공지능에 느끼는 감정을 가짜라고 해야 하나. 꼬리 긴 질문이 화면 곳곳에 파고든다.  

그러나 김태용 감독이 과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 <만추>에서 보여준 영화적 성취와 비교했을 때, <원더랜드>의 밀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감독 특유의 감성과 따스함은 여전히 작품 전반을 휘감고 있지만, 어쩐지 디테일이 부족하다.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 연결이 종종 투박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리듬이 삐걱거리기도 한다.     

 

혹자는 그 원인을 ‘충분하지 못한 러닝타임’과 ‘옴니버스 형식’에서 찾는 분위기인데 이 지적은 반은 맞지만 반은 부적합해 보인다. <원더랜드>의 러닝타임 113분. (우연이겠지만?) 지금 봐도 반짝반짝 빛나는 <가족의 탄생>도 113분. 게다가 똑같은 옴니버스 형식이다. 누구보다 이 형식을 잘 다룬다고 여겨지는 감독인데, 그렇다면 무엇이 차이를 가른 것일까. ‘시간 부족’ 때문이라기보다 ‘시간 배분’의 문제가 아닐까.  

    

시간 배분 면에서 가장 크게 손해를 본 건 수지와 박보검이 연기한 정인과 태주 서사다. ‘원더랜드 속 태주’와 마음을 나누며 무탈하게 살아가던 정인의 일상은 의식불명 상태였던 ‘진짜 태주’가 기적처럼 깨어나 돌아오면서 후폭풍을 겪는다. 이 에피소드가 품은 메시지는 상당히 묵직하다. 진짜 인간 보다 프로그램이 더 나를 이해해 준다면 우린 어떤 선택을 할까. 인간보다 인공지능과 관계 맺기가 더 편하다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할까 등의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영화에서 정인이 겪는 이러한 감정 변화는 충분히 무르익을 시간을 제공받지 못하고 헐겁게 제시될 뿐이다. 다른 에피소드보다 덜 그려져서가 아니다. 주어진 에피소드 분량 안에서, 화보처럼 예쁜 장면이 중간중간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사연이 들어설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충분히 요약되지 못한 정인-태주 에피소드와 달리, 공유가 연기한 AI 성준 등장 신들은 뜬금없이 돌출돼 있다. CG로 완성된 사막 질주 장면이 대표적이다. 호감형 배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그 쓰임에도 물음표를 남기는 터라 득만큼 실도 많아 보인다.      


영상통화라는 설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 중 배우들 간 거리감이 생기는데, 그 물리적 한계를 영화가 극복하지는 못한 인상도 든다. (PC 화면, CCTV, 스마트폰 영상통화, SNS 장면만으로 구성된) <서치>(2018) 등의 영화가 물리적 한계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승화시켜 인간 감정을 밀도이게 그려낸 사례를 돌아봤을 때, <원더랜드>의 통화 신들은 다소 안일하다. 심심하게 그려져서 아쉬움이 남는다. 디테일과 감성이 중요한 이런 영화에서 이러한 거리감은 다소 치명적이다.      


여러 아쉬움 속에서도 <원더랜드>를 외면하기 힘들다면, 그건 영화가 보여주는 어떤 태도 때문일 것이다. <원더랜드>는 AI 기술을 한없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영화가 아니다. ‘원더랜드’라는 공간을 내세워 대리만족이나 판타지를 주려는 영화도 아니다. 죽음이 안기는 이별 앞에서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근심하는 태도가 영화 안에 있다. 그 태도가 적잖은 위로를 안긴다.


('시사저널'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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