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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un 18. 2024

너와 나의 동문서답

인터뷰 녹취를 풀다 보면, 인터뷰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곤 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인터뷰이와 내가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내 질문은 그게 아닌데 대답의 과녁이 엉뚱한 곳에 꽂히기도 하고, 상대 말뜻은 그게 아닌데 난 또 잘못 해석해서 동떨어진 리액션을 하곤 한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언어가 미끄러졌음에도 대화가 무탈하게 이어지는 건, 인터뷰라는 게 애초에 호의에 기반한 자리이기 때문. ‘잘 듣고(인터뷰어)’ ‘잘 말하겠다(인터뷰이)’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이뤄진 인터뷰에서도 이럴진대, 우리 일상에선 얼마나 많은 동문서답이 오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대화라는 게 반쯤은 오해를 품고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화로 풀자, 말로 합시다…. 글쎄, 세상 많은 문제가 말에서 태어나지 않나. 완벽한 타인들이 모인 세상에서 나의 말이 1퍼센트의 오역 없이 상대에게 가 닿길 바라는 건, 희망 사항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가 남이가? 남이다. 상대와 내가 대화로 온전히 연결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나 언어를 ‘사회적 약속’이라 믿기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일단 같은 말이라도 놓여 있는 상황이나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읽힌다. 동일한 말이 농담이 될 수도 있고, 하극상이 될 수도 있고, 성희롱이 될 수도 있다. 상사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샐러리맨들의 슬픈 숙명. 노사 간 대화, 남북 대화, 의대 정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막힌 대화 등 포지션에 따라서도 소통엔 벽이 생긴다.


의도를 숨긴 말들도 많다.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말에 정말 라면만 먹고 나온다면, ‘연애고자’ 소리 듣기 십상이다. “너 나이가 어떻게 돼?”라는 말의 행간엔 ‘내가 너보다 위거든?’이라는 고압적인 자세가 숨어 있곤 한다. 연인 사이의 수많은 대화 역시 모호한 기호들의 방출로 이뤄진다. 다툰 후 화가 잔뜩 난 연인의 “연락하지 마!”라는 말에는 연락을 계속해서 화를 풀어주면 좋겠다는 ‘속뜻’이 숨어 있다. 의도를 놓치고 액면 그대로 해석했다가, 정말로 평생 연락하지 않는 연인들이 세상엔 많다.


결정적으로 대화는 언어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표정·눈빛·몸짓·어감, 이 모든 것의 총합이 대화다. 실제로 대화가 품은 뉘앙스는 본래의 뜻보다 큰 힘을 지닐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나는 카카오톡 메신저가 좀 어렵다. 눈치 보는 성향 탓이기도 한데, 상대의 표정이 거세된 문자를 보며 무슨 뜻으로 저 단어를 쓴 것이지 머리를 싸매곤 한다. 반대로, 나의 말이 곡해돼서 상대에게 전달된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럴 땐 괜히 ‘ㅋㅋㅋ’를 덧붙이며 수습하려 하지만, 엎질러진 말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 손을 떠난 문제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소통이 가장 어려운 순간은, 벽을 치는 사람을 만날 때다. ‘답정너’가 대표적이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라’는 마이동풍식 태도는 대화가 폭망으로 가는 지름길. 그런 사람에겐 우문현답으로 대응하면 좋으련만, 그런 요령이 없을 땐 말을 삼키는 게 차라리 낫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유연한 자세를 지닌 사람, 말 너머의 뉘앙스를 읽어주는 사람, 언어가 지닌 한계를 함께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이토록이나 귀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대화에서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잘 듣기’라는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해결책을 주기엔 한계가 있었던 터라 들어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집에 가는 길에 문자가 왔다. “고마워. 덕분에 고민이 좀 가벼워졌어.” 새삼, 듣기의 위력에 탄복했다. 협상전문가인 류재헌 변호사는 ‘대화의 밀도’에서 “대화의 황금 비율은 3:7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3, 상대가 이야기하는 것이 7일 때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다”라고 썼다. 노선을 이탈한 동문서답 속에서, 다시 길을 찾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세계일보에 쓴 오피니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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