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 아파트. 게다가 볕 잘 드는 남향에 로열층이다. 대한민국 욕망의 상징인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한껏 들떠 있는 경찰 하수영(전도연)은 뜻밖의 암초를 만난다. 연인이자 상사인 임석용(이정재)과 비리에 연루된 것. 수영은 7억원과 아파트를 받는 대가로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그러고 2년. 그동안 연인 임석용은 죽었고, 출소했더니 약속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수영은 돌진한다. 원하는 건 단 하나. '약속' 받은 자신의 몫을 찾는 것이다.
<킬리만자로>(2000), <무뢰한>(2015)에 이어 오승욱 감독은 다시 형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오승욱 세계에서 형사는 정의의 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적당히 타락했고, 증오감과 죄의식을 가지고 산다. <킬리만자로>의 해식(박신양)은 출세를 위해 가족까지 져버린 비열한 악질 형사였고, <무뢰한>의 정재곤(김남길)도 발정제를 이용해 용의자 애인의 자백을 얻어낼 정도도 무자비했던 과거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죄를 홀로 뒤집어썼다고 하나, 비리를 저질러 온 하수영 역시 떳떳한 경찰은 못 된다. 영락한 깡패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해식처럼, 마음을 품었던 김혜경(전도연)에게 칼을 맞으면서도 “나는 내 일을 한 것뿐이지, 당신을 배신한 게 아냐”라고 고백했던 정재곤처럼, 하수영 역시 더 깊은 파멸로 빠지지 않기 위해 ‘자기만의 의식’을 치르려 할 것이다. 만화광이자 영화 박사이고 장르를 가르지 않고 문학을 섭취하는 것으로 유명한 오승욱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언급한 건 그래서 놀랍지 않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오승욱이 끌려온 건, “죄를 지은 사람이 더 죄를 짓지 않으려 하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인물들은 장발장의 변주들이다.
그런 점에서 <리볼버>의 상징인 ‘리볼버’는 쾌감을 위해 등장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수영을 시험에 들게 하는 덫이다. 이를 위해선 하수영에게 리볼버를 건넨 민기현(정재영)의 의중을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하수영-임석용의 사수였던 민기현은 어쩐 일인지 하수영을 향한 원망이 잔뜩 쌓여 있다. 수영의 이간질로 임석용과 멀어진 과거가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듯하다.
그랬던 민기현이 돈의 출처를 수소문하고 있는 수영을 불러 리볼버를 주는 이유. 돕기 위해서? 아니다. 수영이 더 큰 죄를 짓고 진짜 지옥을 맛봤으면 해서다. 수영은 민기현의 그런 의중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리볼버를 손에 쥐고도, 총보다는 삼단봉을 더 많이 휘두른다. 이 게임은 리볼버를 발사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이기는, 독특한 룰의 게임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리볼버>를 만들면서 오승욱 감독님 초창기 떠올렸다는 영화는, 놀랍게도, 이소룡의 <사망유희>다. 놀랍다고 표현한 건 <리볼버>가 <사망유희>와는 결이 다를 뿐 아니라 액션 영화 문법도 과감하게 뒤틀며 나가는 영화여서다. 그렇다면 무엇이 비슷한가. 주인공이 여러 인물(적)을 하나둘 넘고 넘어 목적지에 이르는 형식이다. 물론 큰 차이가 있다. 이소룡이 단계를 거듭해 올라가며 만나는 건 ‘무림의 고수들’이었으나, 하수영이 돈과 아파트 명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이 구역의 무뢰한’들이라는 점에서 <리볼버>만의 개성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 구역의 무뢰한들은 관객의 예측을 예의 벗어나는 행보로, 영화에 묘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내 편인지 네 편인지 누구 편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수영의 “에브리씽”에 호감을 느낀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 정윤선(임지연), 온갖 ‘척’은 다 하지만 전형적인 ‘강약약강’ 스타일에 지나지 않는 앤디(지창욱), 그런 앤디를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레이스(전혜진), 수영에게 질투인지 미련인지 모를 감정을 노출하는 신형사(김준한), 결정적인 순간 “시마이~”를 외쳤다가 자기 인생이 진짜 시마이 될뻔하는 조 사장(정만식),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트러거인 임석용… 인물들이 저마다 지닌 욕망이 하수영의 부딪혀 알록달록한 색깔을 낸다.
거칠게 말하면 <리볼버>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하수영이라는 ‘액션’과 그녀가 단계별로 만나는 인물들의 ‘리액션’이라고 할만하다.
모든 인물이 한데 모이는 ‘숲’ 신은 '리볼버'의 독창성이 타오르는 구간이자, 감독이 아이덴티티가 빛을 발하는 하이라이트이며, 동시에 관객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분기점이다. 멋들어진 액션을 뿜어낼 조건들이 만발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자기만의 길’을 간다. 익숙한 장르적 문법을 과감하게 거스르며 기어코 인간의 지질함을 건져 올린다. 장르적 쾌감을 기대했을 관객 입장에선 배신일 터. 그러나 그 기기묘묘한 리듬에 올라탄다면, 배신이 아니라 진귀한 영화적 체험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인물 각각의 퍼스널리티가 중요한 정서로 작동하는 영화에서, 배우들은 자신의 몫을 충분히 이행해 낸다. 임지연은 <더 글로리>에 이어 영광스러운 순간을 극에 박아낸다. 지창욱은 신선한 연기 총알을 새로 장전한 듯 보인다. 특별출연이라는 이름으로 힘을 보탠 이정재, 정재영, 전혜진의 존재감은 극의 온도를 높인다.
그러나 전작 <무뢰한>이 그랬듯 <리볼버>의 총알 역시 전도연이다. 수영이란 인물로 투신한 전도연은 ‘무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런데, 신기하지. 무표정에서 ‘표정’이 읽힌다. 이 형용모순의 상황을 전도연은 자신의 얼굴로 실시간 중계해 낸다. 굳이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서도, 부정당한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 애쓰는 표정에서 풍겨 나오는 ‘삶의 피로’는 전도연이 아니었으면 구현해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전도연의 얼굴을 건져 올린 이는 오승욱 감독이다. 이쯤이면 <무뢰한>에 이어 전도연 얼굴 발굴단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아이즈'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