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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Oct 15. 2024

<전,란> 오해할 결심, 붕괴된 우정

<전,란>은 출발에서부터, 말하고 싶은 바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영화다. 반정 세력으로 몰려 자결하는 사상가 정여립(1546~1589)을 통해서다. 정여립이 누구인가. 양반과 노비가 어우러지는 세상을 꿈꿨던 대동계(大同契) 수장. 천하의 주인은 따로 없다는 정여립의 파격적인 주장을 권력 정점에 있는 임금이 반길 리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선조(차승원)는 정여립이 죽어가며 남겼다는 말을 히스테릭하게 읊조리며 바들바들 떤다. "임금이나 노비나 대동하다?" 이것은, 선조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규정한 '반어법'. 영화 입장에선 시대에 던지는 '돌직구'다.      


이 물음은 <전,란>의 살과 뼈다. 임진왜란이 극 전반에 중요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이 시기를 자막으로 처리하고 넘길 정도로 왜군과의 싸움에서 파생되는 민족주의적 감정은 흐리다. 대신, 영화는 ‘외부의 적’을 통해 ‘내부의 모순’을 돌아본다. 어떤 모순? 조선 사회를 휘감고 있는 신분제라는 모순이다. 왜란이라는 중대한 사건 묘사를 전략적으로 거세하면서, 내부 시스템의 폐해를 부각시키는 영화의 야심이 상당하다.      

전(戰)에서 시작해 쟁(爭)→반(反)→란(亂)에 이르는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된 영화가, 제목에서 반과 란을 '쉼표' 처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건,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전쟁이 도화산이 돼 폭발한 시대의 썩은 고름이니 말이다.      


시스템의 폐해는 개인의 비극으로 치환된다. 그 한 가운데 양인이었으나 부모의 빚으로 한순간에 노비로 전락한 천영(강동원)과 무신 집안의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칼로 누군가를 해하는 데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도련님 종려(박정민)가 있다. 신분상 가까워질 수 없는 두 사람은, 그러나 타고난 기질로 가까워지고, 우정을 나누며 성장한다. 천영의 대리시험으로 종려가 장원급제하는 위험스러운 비밀까지 나누면서 말이다.      

이들의 우정은, 세력가들을 향해 눌려있던 민중의 분노가 전쟁을 계기로 폭발하면서 부서진다. 노비들의 반란으로 종려 일가족이 죽고, 종려가 이를 천영이 주도한 것으로 오해하면서 관계는 파멸로 치닫는다. 천영은 몰랐을 것이다. “칼에 분노가 실려야 한다”고 종려에게 조언한 말이 자신에게 돌아올 줄. 종려 역시도 몰랐을 것이다. 그 분노가 천영을 향할 줄은.     


갈라진 길, 서로 다른 운명, 너무나 다른 신분. 임금을 지키기 위해 백성을 베는 종려와, 백성을 지키려 왜군을 베는 천영의 대비를 교차 편집한 장면은 이들 우정의 비극은 물론, 시대의 모순을 압축해 낸다. 슬프지만 역설적으로, 근사한 장면이다.      

<전,란>의 매력은 겹겹이 두른 관계의 레이어다. 천영과 종려로 대변되는 ‘신분의 대비’뿐 아니라, 같은 무리 안에서도 다른 길을 가는 인물들을 통해 ‘신념의 대비’도 보여준다. 양반 출신으로 이상을 꿈꾸는 의병장 자령(진선규)과 이상보다는 삶의 순리를 추구하는 평민 출신 의병 범동(김신록)이 대표적이다. 각자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하게 녹아 있다. 다만, 126분 안에 이 모든 인물을 충분히 담아내는 게 버거워 보인다. 넓게 파긴 했지만, 그 깊이가 얕달까.       


검을 들고 도포 자락 휘날리는 강동원의 아우라는 여전하다. 기구한 운명 앞에서 ‘슬픈 눈’이 됐다가, ‘청(靑)의 검신’이 됐다가, 종종 ‘전우치’의 면모도 보이는 것이, <전,란>은 강동원에게 깔아 놓은 멍석 같다. 차승원이 해석한 선조는 뱀의 형상으로 극에 똬리를 틀고 있는 느낌이다. 전쟁이 나자,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 선조는 그동안 여러 미디어에서 무능하고 열등감 강한 인물로 그려져 온 바 있다. 차승원은 이런 선조 이미지에 히스테릭함을 더해 만만치 않은 포스를 포착해 낸다.      


<전,란>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박정민이 연기한 종려다. 선비로 태어났으나, DNA에 남다른 심성이 흐르는 인물. 누군가에겐 부하 한마디에 천영을 오해하는 종려가 줏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게 오히려 종려 같단 생각이다. 온 가족을 잃은 슬픔 앞에서 그가 붙잡은 건 분노였다. 그냥 분노여서는 안 된다. '살아내기' 위해선 강력한 분노가 필요하다. 그랬을 때 가장 강력한 분노를 줄 수 있는 사람. 역설적이지만 생애 걸쳐 우정을 나눠 온 천영이었을 것이다. 그의 분노는 뒤집으면, 애증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해석. <전,란>에서 박정민은 닫힌 인물로서의 종려가 아닌, 그 어떤 해석도 가능한 인물로 종려를 열어 놓는다.      

김상만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전,란>은 박찬욱 감독이 넷플릭스와 손잡은 첫 영화라는 점에서도 주목도가 높은 작품. 그러나, 넷플릭스 작품이라는 걸 아쉽게 하는 장면이 있다. '천영-종려-일본놈(겐신)'이 삼각형을 이뤄 해변에서 싸우는 장면이다. ‘헤어질 결심’을 했던 천영과 종려가 뒤엉키는 이 신에서 종려는 진실 앞에 ‘붕괴’되고, 천영은 ‘마침내’ 친구의 마음을 확인한다. 액션이 독창적이진 않지만, 해무 깔린 해변이 안기는 시각적 터치가 상당해서 스크린에서 봤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전,란>은 넷플릭스의 옷을 입고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돼 여러 논쟁을 남긴 바 있다. 변화하는 미디어 산업 속에서 <전,란>의 운명 또한 파란만장하다.


(+'아이즈'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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