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인물이 퍼스널리티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자기다움과 성정을 잃지 않는 캐릭터를 통해 인간 승리(혹은 그 반대)의 서사를 그려낸다. 반면 어떤 영화는 캐릭터를 뒤집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설경구가 “나 돌아갈래~”를 외쳤던 <박하사탕>이 대표적이다. 순수했던 남자가 폭력의 시대 안에서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이창동 감독은 메스로 도려내듯 파고든 바 있다. <보통의 가족>은 후자다.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격하게 구부러지는 과정이 골자다. 시작은 고고하나, 그 끝에서 인간의 본성이 바닥을 친다.
형 재완(설경구)은 잘나가는 변호사다. 사람 위에 법이 있고, 법 위에 돈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돈만 많이 입금해 준다면, 다소 구린 피의자라도 변호한다. 그의 주요 고객은 돈 있는 사람들이다. 재벌가 망나니 자식들 같은. 동생 재규(장동건)는 의로운 의사다. 돈보다 중요한 게 원리 원칙과 도덕이고 그것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게 사람이다. 돈이 없는 환자라도 ‘생명이 먼저’라며 치료해 준다.
한 부모에게 태어났지만, 가치관은 대척점에 있는 형제는 정기적으로 갖는 부부 동반 식사 자리를 통해 나름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삶의 패턴도, 경제적 상황도, 치매 걸린 어머니 돌봄에 대한 생각도 상이한 형제의 대화는 자주 겉돌고, 종종 충돌한다. 형제만큼이나 동서지간인 재규의 아내 연경(김희애)과 재완의 아내 지수(수현) 사이에도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이 흐른다. 아닌 척하지만 (남편보다 나이 많은 연상의) 연경은 재완이 재혼한 ‘어린’ 지수에게 자격지심을 숨지지 못한다. 괜찮은 척 하지만 지수 역시 자신을 ‘가족 외 사람’으로 투명 인간 취급하는 연경이 불편하다. 경제적 격차, 나이 격차, 생각의 격차……. 네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 미묘한 ‘선’에서, 냄새가 나는 듯하다.
각자의 길을 가던 이들을 한배에 태우는 일이 발생한다. 미성년자인 재완의 딸과 재규의 아들이 노숙자가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폭행한 것이다. 경찰과 네티즌은 CCTV에 희미하게 담긴 남녀의 실루엣으로 범인을 찾아 나서고, 재완과 재규 부부는 희미한 실루엣만 보고도 바로 자신들의 자식임을 알아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상이 분명하지 않아 범인을 특정하기 힘든 상황. 게다가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노숙자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사건이 묻힐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이제 부모들은 선택해야 한다. 진실을 알면서도 덮거나, 자식이 죗값을 치르도록 하거나.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어렵지 않은 선택지다. 당연히 후자가 옳다. 그것이 정의라 생각된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아이가 당신의 아이라면? 그래도 고민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인가. 자식 앞에 서면, 타인에게 적용하던 기준이 흐려지는 부모들 심연을 <보통의 가족》은 공략한다.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2009년 작품이 <보통의 가족>의 원작이다. 원작 제목은 ‘더 디너’다.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세 번의 부부 동반 식사 자리는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한다. 인물들의 성격과 상황을 소개하는 기능이 큰 첫 번째 디너는, 부모들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술자리에 나간 아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날이라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하필, 이날! 연경은 죄지은 아들을 탓하기에 앞서, 이날 자리를 비운 자신을 탓한다. 연경에게 아들은 인생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급하게 소집된 두 번째 식사 자리에선 아이들 미래를 위해 사건을 덮자고 주장하는 부모와, 정당하게 죗값을 치르는 것이 오히려 아이들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모로 첨예하게 나뉜다. 예상대로 전자가 재완, 후자는 재규다. 도덕 선생님 같은 말만 하는 남편 때문에 연경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재규는 완강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인물들이 구부러지는 이야기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도 이 부분이다. 그 광경이 담긴 게 세 번째 디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에 따라 뜻을 굽히지 않던 이들의 신념이 역전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만찬. 처음의 입장에서 노선을 갈아타는 형제의 변화를 영화는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는 동시에 블랙코미디를 적절히 섞어 건조함을 거세했다. 딱히 새롭다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밀도 높은 영화 호흡이 몰입을 부른다.
재완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 그건 그가 양심을 밟아가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자신의 아이가 ‘진짜 괴물’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노숙자를 향한 차별, 생명 경시, 죄를 짓고도 뉘우치지 않는 양심 없음. 이번 일을 잘 넘기면 딸은 대한민국이라는 계급 사회에서 주요 자리 하나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과연 옳은가. 재완은 보통의 얼굴을 하고 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괴물 앞에서 소스라친다. 참고로 설경구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도 학폭 가해자 아버지이자 변호사를 연기한 바 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인물을 비교해 보는 것도 나름의 관람 포인트다.
장동건이 연기한 재규라는 인물은 영화적으로도 그렇지만 심리학적으로 바라봐도 매우 흥미롭다. 대쪽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 그러나 그 대쪽 같던 인생에 작은 흠결이 나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몰락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규가 그렇다. 물론,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에 대한 하나의 가설. 재규에겐 형보다 많이 벌진 못해도, ‘더 옳은 일’을 한다는 프라이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프라이드가 그의 인생에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형이 ‘딸에게 자수를 권유하겠다’고 입장을 번복하자, 자식을 위해 모든 죄를 봉인하겠다고 결심한 재규는 무너진다. 왜일까. 아들의 앞날이 걱정돼서가 다일까? 그건, 형보다 훌륭하다고 믿었던 도덕성마저 형보다 아래로 바닥을 쳤다는 견딜 수 없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보통의 가족>에서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사실 배우가 아니다. 그건 허진호 감독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드라마 <인간실격> 등에서 인물의 정서를 예민하게 포착해 온 감독에게 사회적 질문에 앞세운 <보통의 가족>은 ‘허진호라는 작품 세계’에서 동떨어진 섬 같다. 이 변화, 나쁘진 않다. 일정 수준의 만듦새를 <보통의 가족>이 확보하면서, 연출의 영역을 한 뼘 넓혔으니 말이다. 입양, 인종차별, 유전, 계급 등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녹아 있는 원작은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몇몇 요소를 덜어내고 ‘학폭’ 이슈를 입었다. 학폭이 뜨거운 사회 이슈인 작금의 한국 사회를 생각했을 때, 매우 동시대적인(동한국적인?) 각색이 아닐 수 없다.
('시사저널'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