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전성기는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 사후 등장하는 다섯 명의 황제 시절, 그러니까 덕망 있는 다섯 명의 황제가 로마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던 '오현제(五賢帝)' 시대다.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는 ‘명상록’을 쓴 스토아 철학자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는 여러 빼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자식 농사를 잘못 짓는 바람에 역사에 큰 빚을 졌다. 그 결과물은 바로 로마 제국 17대 황제이자 폭군이었던 콤모두스. 능력 있는 인물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 앞선 네 명의 황제와 달리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에게 황위를 물려줬는데, 이것은 패착이었다. 로마 제국은 역사가 '폭군'으로 기록하는 콤모두스 시절부터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으니 말이다.
리들리 스콧이 콤모두스 시절을 내세워 만들었던 영화가 2000년 개봉한 <글래디에이터>였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콤모두스로부터 가족을 잃고 노예로 전락한 막시무스(러셀 크로우)가 콜로세움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 전 세계 4억60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한 《글래디에이터》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의상상, 음향상, 시각효과상 등 5관왕을 휩쓸며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했다. 할리우드에서 <벤허>(1959) 이후 명맥이 끊겼던 역사극 장르 훈풍을 되살린 것도 이 영화다. 호러 <에이리언>(1987), 로드무비 <델마와 루이스>(1993), SF <블레이드 러너>(1982) 등 장르를 오가며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보여줬던 리들리 스콧의 명성은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또 한번 업그레이드됐다.
<에이리언>을 <프로메테우스>(2012), <에이리언 : 커버넌트>(2017)로 살려내고, 드니 빌뇌브를 내세워 <블레이드 러너>를 <블레이드 러너 2049>(2017)로 다시 깨운 리들리 스콧이 <글래디에이터>를 부활시킨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는 일이었다. 다만 <프로메테우스>와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글래디에이터> 속편에 대한 불안감을 키운 게 사실이다. 게다가 극의 심장과도 같은 막시무스와 혈관과도 같은 콤모두스가 없는 <글래디에이터>라니. 어쩌시려고!
리들리 스콧은 콤모두스만큼이나 폭군으로 이름을 떨친 게타(조셉 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 시대를 주목했다. 24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글래디에이터2> 속의 시간 역시 전편으로부터 20여 년 후다. 막시무스가 콜로세움에서 숨을 거둔 후 로마는 어떻게 되었는지가 그려진다.
<글래디에이터2>는 북아프리카 왕국 누미디아의 전사 하누(폴 메스칼)가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가 이끄는 로마 군대에 아내를 잃고 전쟁 포로가 되면서 시작한다. 사람 보는 눈이 비상한 야심가 마크리누스(댄젤 워싱턴)의 눈에 띄어 콜로세움에 들어선 그는 오래전 막시무스가 그랬듯 검투사로서 이름을 알리며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여기서 영화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무딘 칼'을 꺼낸다. 알고 보니, 하누가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인 루실라 공주(1편에 출연했던 '코니 닐슨'이 그대로 이어받았다)와 막시무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 루시우스라는, 전혀 놀랍지도 그다지 새롭지도 않은, 닳고 닳아 구멍이 난 서사였다.
영웅 서사의 원형 자체가 빤한 면이 있으니 어느 정도 수긍하지 못할 건 아니다. 다만 서사 자체가 낡은 것이라 해도 그것을 풀어가는 디테일로 새로운 함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어쩐 일인지 <글래디에이터2>는 그 부분에서 내내 미진하다. 자신을 몰래 찾아온 엄마 루실라를 내치던 루시우스의 급격한 심경 변화 등이 뜬금없고, 루실라 공주가 꿈꾸는 미래에 대한 설명은 부진하다. 묵직한 카리스마를 한번쯤 내지를 것 같은 인물들도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퇴장하는 탓에 캐릭터에 탄력이 잘 붙지 않기도 한다.
시리즈의 새로운 얼굴이 된 폴 메스칼은 <애프터썬>(2023)을 통해 영화계에서 두각을 강하게 어필한 배우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막시무스의 그늘에 가린 느낌이다. 배우의 영향력 문제일까, 연출의 문제일까. 후자 쪽에 조금 더 높은 점수를 두는 건 영화 설계 자체가 루시우스에겐 다소 불리하게 돼있단 생각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글래디에이터2>의 모든 길은 막시무스로 통한다. 영화는 막시무스 지우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끌어안기를 선택했다. 막시무스의 과거 영상이 교차하며 이어질 뿐 아니라 그가 남긴 흔적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루시우스가 추종자들에게 힘을 얻는 과정에도 그가 막시무스 아들이라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발 딛고 섰던 막시우스에 비하면 루시우스는 여러모로 '얻어걸린 금수저 인생' 아닌가.
러셀 크로우의 빈자리만큼이나 호아킨 피닉스의 공백 역시 크게 보인다. 콤모두스처럼 게타와 카라칼라 황제 역시 실존 인물들이다. 공동황제였던 두 사람은 권력을 둘러싼 막장극을 펼친 폭군들이다.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죽이고 홀로 황제에 오르지만, 그 자신도 결국 암살되는 비운을 맛본 황제이기도 하다. 이처럼 풀어낼 여지가 컸던 황제들이지만, 리들리 스콧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대신 마크리누스라는 또 하나의 악역도 심었다. 호아킨 피닉스의 존재감을 '게타-카라칼라-마크리누스'로 3분할한 셈이다. 문제는 인물을 나눠서 커진 게 아니라, 각각의 개성을 충분히 살라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그 합이 호아킨 피닉스의 콤모두스 존재감보다 작아졌다는 것이다. 악역이 충분히 살지 못하니, 영웅의 존재감도 심심해졌다.
"로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라는 리들리 스콧의 말은 사실이다. 로마 해군과 누미디아의 공성전을 시작으로 코뿔소와의 전투, 콜로세움을 물로 채우고 재현한 살라미스 해전 등 24년간 발전한 VFX 기술을 극에 한껏 녹여냈다. 어쨌든 '돈값'은 한다. 극장에 갈 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글래디에이터2>를 보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리들리 스콧 '옹'의 근심이었다. 86년을 살아온 스콧은 현실을 반추하며 시대의 대통합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루시우스가 꿈꾸는 건 새로운 공화정이다. 공화정을 부활시켜 권력을 백성에게 돌려주려는 루시우스의 행보는 최근 지구촌 곳곳에서 포착되는 폭군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영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 했는지 읽힌다. 다만 노(老)감독의 이러한 근심이 보고 싶어서 극장을 찾는 관객은 극히 드물 것이다. 실제로 그 근심은 박력 넘치는 영화를 보고 싶었던 관객에게 다소 찬물을 끼얹는다.
('시사저널'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