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족>의 대반전은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한 부림사건(釜林事件)을 모티프로 <변호인>을 만들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도발적으로 그려낸 <강철비> 시리즈의 양우석 감독이 가족 코미디를? 연출자가 여러 장르를 오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워낙 묵직한 주제를 담아 온 연출자이기에 놀랍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의구심을 안고 마주한 <대가족>을 보면서 대반전이라는 생각은 수정했다. 왜 지금 가족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감독 나름의 철학이 읽혀서다.
“와~ 한국 완전히 망했네요!” 2022년, 한국 합계 출산율이 0.78명이라는 이야길 들은 조앤 윌리엄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법대 명예교수가 내뱉어서 화제가 된 말이다. 실제로 저출산은 2024년을 관통한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 저출산에 따른 인구 소멸로 비명을 지르는 지역들이 속속 드러났고, 부동산 쏠림이라는 부작용도 이어졌다. 전통적인 가족 개념의 해체에 대해 숙고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양우석 감독이 DIRECTOR'S LETTER를 통해 전한 말을 짚을 필요가 있겠다. "지난 반세기 한국에서의 가족의 형태, 의미, 관계는 크게 변했습니다. 인류사 어디를 찾아봐도 이렇게 짧은 시기에 이렇게 가족이란 존재의 변화가 큰 곳이나 때는 없었습니다. <대가족>은 그 변화를 삶이 바빠서 잠깐 잊고 있었던 분들에게 상기시키고 질문하는 영화입니다" 타이틀로 내건 대가족도 크다(大)'의 '대'가 아니다. 대하여(對)'의 '대'다. 그러니까, <대가족>은 가족에 대한 영화다. 어떤 의미에선 매우 시의 적절한 영화랄까.
‘평만옥’. 종로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이북식 만둣집이다. 평만옥의 주인은 한국 전쟁 때 월남한 함무옥(김윤석)이다. 만두 하나로 자수성가한 무옥에게는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자손이다. 의대를 다니던 외동아들 문석(이승기)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면서 대가 끊길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나~무 관세음보살. 그런 함문석 앞에 어린 남매 민국(김시우)과 민선(윤채나)이 나타나 말한다. "우리 아빠가 함문석이에요!" 스님에게 숨겨진 자식이 웬 말인가. 코너에 몰린 문석과 달리, 무옥의 귀엔 웃음이 걸렸다.
존재도 모르고 살던 자식이 갑자기 나타나, "I'm Your Son/Daughter"라고 말하는 영화가 새로울 건 없다. <가족스캔들> <파송송 계란탁>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 예다. <대가족>은 여기서 발칙한 상상을 하나 더 얹었다. 그것은 바로, '정자' 스캔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정자가 맞다. 난자와 만나는 정자.
사연은 이렇다. 문석은 의대 시절, 여자친구(강한나) 아버지인 난임 시술 전문의(최무성)의 강권으로 정자를 쉼없이 기증했는데 그때 기증한 정자를 통해 세상에 태어난 생물학적 자식들이 전국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언빌리버블한 이야기. "12개국 수십 쌍의 부부에게 정자를 기부해 100명 이상의 생물학적 자녀를 뒀다"고 고백하며 '정자왕' 네이밍을 거머쥔 텔레그램 창립자 파벨 두로프도 놀라워할 일이다. 그러나 두로프도에게 정자 제공이 선택이었다면, 문석에겐 "업보다. 업보!" 영화는 이 황당무계한 사연은 코미디라는 장르를 방패 삼아 거리낌 없이 내달린다.
<대가족>은 정자 스캔들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있지만, 감독이 목표한 바를 떠올렸을 때 이건 단순한 흥미 위주의 에피소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윤리적 문제는 차치하더라고, 정상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니 말이다. (자녀들을 정자 기증과 체외수정 기술을 통해 얻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저출생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며 출산율·인구 추세 연구에 1000만 달러(약 138억)를 기부한 사례를 떠올렸을 때, 영화적 판타지로만 볼 문제도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대가족>이 정자 기증을 외치는 영화냐. 그건 아니다.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대안 가족'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더한다. 이 서사의 중심엔 '무옥의 성장'이 있다. 핏줄에 목매던 전근대적인 남자 무옥의 변화를 통해 영화는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함무옥의 성장은 가부장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순수한 의미에서, 전반부 서사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반긴다면 후반부는 입양정책위원회가 좋아할 만하다.)
다만, 이런 이야기일수록 조금 더 세련된 화법이 필요한 법인데 감동을 끼얹은 후반부 서사가 너무 교훈적이고 투박해서 힘이 빠지는 면이 있다. 억지스럽다 할지라도 목표한 바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양우석 감독의 뚝심이 이번에도 장점이자, 단점으로 드러난다.
(PS. 스포일러.) 영화 말미에 무옥은 그림자처럼 자신을 지켜줬던 방여사(김성령)에게 청혼한다. 그때 내세운 이유 중 하나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민국-민선을 입양할 수 없다"는 것. 여기엔 시대상이 숨어 있다. 2024년도라면 이 대사는 거짓. 영화의 배경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친양자 입양은 민법상 '3년 이상 혼인 중인 부부로서 공동 입양할 것'이라는 규정에 따라 혼인 부부에게만 허용됐지만, 2022년부터 독신자에게도 입양의 길이 열렸으니 말이다.
아, 통계청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24년 9월 인구동향'에서 올해 3분기 합계출산율은 0.76명으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0.05명 늘었다. 1년 전보다 늘긴 했지만, 조앤 윌리엄스 교수가 "한국, 망했다"고 말한 0.78보다는 낮은 수치다.
('아이즈'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