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서 자기반영적 연기로 호평세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방심하는 순간 날아드는 것. 악플이다. 살이 쪄서 대중 앞에 나타난 스타에겐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린다. "프로가 자기 관리도 안 하는 거야?" 평소와 달라진 얼굴로 나타나면 어김없이 이런 소리가 날아든다. "또, 의느님 만났네!" 관리를 심하게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되는, 미세하디 미세한 적정선. 이 적정선은 여성 스타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특히 노화는 여성 엔터테이너들이 필사적으로 막아내야 할 호환마마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져 왔다.
젊은 신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엔티테언먼트 산업에서 스테디셀러로 머무는 건 극히 일부. 대중은 변덕이 심하고 유행은 변하기 마련이다. 언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외모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 속에서의 자존감 추락. 80~90년대 할리우드가 낳은 스타 데미 무어의 삶은 이런 시선들 속에서의 자기 분투였다.
1981년 드라마 '초이스'로 데뷔한 데미 무어는 '세인트 엘모의 열정'(1985)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이 시기 영국 기타리스트 프레디 무어와의 결혼-이혼을 겪었다. '무어'라는 성은 이 시절이 남긴 흔적이다. 브루스 윌리스와 부부가 되던 1987년, 데미 무어는 당대의 스타와 결혼한 행운아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무어의 경력은 페트릭 스웨이지와 호흡을 맞춘 '사랑과 영혼'(1990)을 통해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죽어서 유령이 된 연인과 소통하는 청순한 몰리 역으로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이다. 그녀가 극 중에서 한 숏컷 머리가 유행했고, 무어는 청순의 아이콘이 됐다. 그때 세상은 데미 무엇의 것이었다.
그러나 데미 무어는 자신을 '청순'이라는 이미지에 가두지 않았다. 군대 내 폭력을 그린 법정 영화 '어 퓨굿 맨'(1992년)에서 그녀는 정의감 불타는 해군 소속 수사관으로 분해 톰 크루즈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90년대, 이런 류의 수사극에서 여성 캐릭터는 대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거나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만을 담당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제작진은 로맨스를 양념으로 뿌리려고 했으나, 그 자체로 능동적인 여성이고 싶었던 무어는 자신의 캐릭터가 프로페셔널하게 남도록 방어해냈다.
1991년, 임신 7개월이던 데미 무어는 잡지 베니티페어(Vanity Fair) 표지에 나체로 나타나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가 찍은 사진이었다. 지금이야 '임신 누드'가 하나의 트랜드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는 임신한 여성의 몸이 금기의 대상처럼 여겨지던 시대다. 이 표지는 당대 여성의 신체와 모성에 관한 갖가지 담론과 뜨거운 논쟁을 불렀다. 임신한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편견에 반기를 들고자 했던 데미 무어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기록적인 판매 부스는 덤이었다.
무어의 몸이 늘 유의미한 담론을 형성한 건 아니다. 스트리퍼를 연기한 '스트립티즈'(1996)는 그녀의 전라 연기로 화제를 모은 작품. 당시 여배우로서는 최고의 출연료를 받아 이슈가 됐지만, 동시에 '노출증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어야 했다. 이듬해 출연한 '지.아이.제인'에선 강인한 체력을 지닌 네이비실 최초의 여성 중위 오닐을 맡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했다.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삭발한 머리. 근육으로 다져진 몸. 대역 없이 소화한 고난도의 액션. 무어는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강인한 육체적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아쉽게도 비평에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양 극단을 오가며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변환하려 한 도전은 인상적으로 남았다.
이후 데미 무어의 연기 인생은 하향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그녀가 마흔으로 접어든 시기와 겹친다. 당시 데미 무어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40대가 넘으면 많은 여배우들이 자신의 경력은 끝났고 느낀다. 이때부터 좋은 역할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보여줄 게 많다. 업계 시스템에 굴복하거나, 앉아서 배역을 기다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여성의 몸을 상품처럼 취급하는 할리우드에 날린 일침이었다.
그러나 무어는 이러한 문제 인식을 영리하게 돌파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연기가 아닌, 전신 성형으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늙어 보인다"는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고 거액의 전신 성형을 감행한 것 또한 황색 언론의 먹잇감이됐다. 브루스 윌리스와 헤어진 후 결혼한 16살 연하의 남편 연하남 애쉬튼 커처와의 사생활도 심심풀이 땅콩처럼 가십거리가 됐다. 대중은 "데미 무어가 어린 남편 때문에 젊음에 집착한다"고 비아냥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가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커처와의 이혼이 남긴 충격은 그녀에게 약물 남용과 거식증, 재활원 감금 치료라는 폭탄을 안겼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공개된 후 줄곧 '미친 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 '서브스턴스'는 그런 데미 무어의 자기 반영적인 연기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데미 무어가 연기한 엘리자베스는 할리우드 톱 클래스 배우였지만 50세가 되면서 업계로부터 퇴물 취급을 받게 된 인물. '더 이상 섹시하지도 않다'는 이유로 방송 프로그램에서 해고당한 그날,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라는 신비한 약물의 정보를 듣게 된다.
고민 끝에 약을 구입, 투약한 엘리자베스. 그러자 엘리자베스의 등을 까고 20대의 젊은 육체를 지닌 '또 다른 나', 수(마거릿 퀄리)가 태어난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는 복제된 자기 자신. 그러니까 수와 일주일 간격으로 몸을 번갈아 가며 살게 된다. 비극은 엘리자베스가 '또 다른 나'인 수를 질투하면서 생긴다. 수가 '자신의 본질'인 엘리자베스의 늙음을 혐오하는 것 또한 비극에 기름을 붓는다. '나'와 '또 다른 나'가 서로를 파괴하려는 드는 '웃픈' 상황을 통해 영화는 '자기혐오'가 얼마나 서늘한 부메랑으로 돌아오는가를 섬뜩하게 그려낸다.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는 산업에도 피를 뱉는다.
위험한 선택을 하면서까지 젊음을 욕망하는 엘리자베스의 사투는, 데미 무어의 실제 역사와 중첩되며 기괴한 힘을 얻는 동시에 슬픔을 자아낸다. 놀랍게도 이 캐릭터에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제작진이 아니라, 데미 무어다. 2019년에 쓴 자서전 '인사이드 아웃'을 감독에게 보내며 출연에 대한 의지를 보여였다는 후문. 자서전엔 어린 시절 당한 성폭행, 극단적인 다이어트와 약물 남용 등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그러니까, 데미 무어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자조를 엘리자베스의 몸을 통해 살풀이 하듯 풀어낸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이러한 무어에 대해 "이미 모든 두려움과 공포증, 모든 폭력에 맞선 삶의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데미 무어는 이 영화로 오스카 등 각종 시상식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 무어는 그렇게 자신이 파괴한 자신을 살려내는 중이다.
(아이즈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