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woorain Oct 08. 2023

‘푸바오’와 ‘바람이’로 바라게 된 것

내 인생 ‘덕질’ 대상에 판다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나는야, 푸덕이(푸바오 덕후). 용인 에버랜드에 거주 중인 푸린세스 ‘푸바오’뿐 아니라, 푸바오 부모 ‘아이바오’ ‘러바오’의 열혈 팬이다. 과몰입이 심했는지, 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알고리즘은 판다로 초토화됐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도 푸바오 영상 하나 무심코 눌렀다가, 한 시간 넘게 넋 놓고 ‘귀여워!’를 연발해 버렸다. 요즘 일상이 이렇다. 해야 할 일을 잊고 판다 영상으로 1∼2시간 보내기 일쑤다. 이런 나의 판다 앓이에 지인들은 짐짓 놀라는 눈치다. “너, 동물에 죽고 못 살지 않았잖아!” 그렇지. 난 동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 동물원에 호의적인 인간도 아니었는데, 왜 이러지?


이유야 노트를 채울 만큼 많지만, 가장 큰 건 판다와 사육사 사이의 교감에 있다. 사육사 장화를 잡고 놀아 달라 떼쓰는 푸바오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푸공주를 위해 대나무 기타, 댓잎 모히토, 푸영우 김밥, 푸마트폰 등을 만드는 송바오(송영관 사육사)의 정성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특히 쌍둥이를 갓 낳고 예민해 있던 아이바오가 방으로 들어와 마주 앉는 강바오(강철원 사육사)의 케어를 경계심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너무나 경이로워서 보고, 보고, 또 봤다. 언어로는 설명 불가한, 종(種)을 뛰어넘는 유대가 그들 사이엔 있었다.


물론 모든 동물이 바오 가족처럼 자연 생태 가깝게 조성된 곳에서 사는 게 아니고, 극진한 돌봄을 받는 것도 아니다. 푸대접받다 죽은 암사자 사순이가 그렇다. 경북의 한 농장에 살던 사순이에게 허락됐던 공간은 4평 남짓. 사방이 콘크리트인 철창 안에서, 그저 눈 뜨고, 밥 먹고, 배설하고, 배회하다가, 잠들고, 다시 눈 뜨고, 밥 먹고…. 그렇게 ‘올드보이’ 오대수처럼 20년간 감금됐다. 그러던 8월의 어느 날, 관리인 실수로 문이 열렸다. 탈출을 의도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문이 열렸으니 나갔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밟아보는 흙. 농장에서 불과 20m쯤 떨어진 숲속에서 사순이는 그렇게 생애 처음 만나는 감각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인간에 위협이 될 수 있단 이유로 사순이는 사살됐다. 1시간 10분의 짧은 자유였다.  


처음엔 죽였어야 했나, 분노했다. 그러다 든 생각. 우리로 돌아갔다면, 사순이는 행복했을까? 기사에 바르르 떨던 나는 본능적으로 푸바오를 찾았다. 순간 ‘아차’했다. 인간에 상처받은 동물에게 느낀 슬픔을 또 다른 동물로 덮으려는 내 모습이 모순적이어서. 판다를 멸종위기로 몰아넣은 건 그들 서식지를 파괴한 인간인데, 그런 판다로 힐링 운운하는 게 미안해서. 인간이 만든 공간에 동물을 가둬 두는 게 과연 맞는 건가.


그러다가 ‘갈비뼈 사자’를 보았다. 열악한 우리에 갇혀 앙상하게 말라 가던 사자는 한 시민의 동물 학대 민원 제기로 세상에 알려졌고, 청주동물원이 돌보겠다고 나서면서 지난 7월 새 보금자리를 만났다. 이송되는 날, 이름이 정해졌다. 바람이. ‘좀 더 좋은 삶을 바란다’는 의미의 이름이었다. 한동안 내실에서 꿈쩍 않던 바람이는 이제 야외 방사장으로 나와 거닐기도 하고 사육사들과 교감도 한다. 살도 붙어서 제법 라이언 킹 티도 난다. 좋아진 환경 덕만은 아니었다. 수의사와 사육사들의 애정이 바람이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다시 생각한다. 동물을 가두는 게 옳은가. 궁극적으로는 동물원 없는 세상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멸종위기종과 당장 갈 곳이 없는 동물들을 고려했을 때 ‘동물원을 없애라!’는 현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바람이와 푸바오가 보여 주듯, 동물원에서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는 게 아닐까. 강철원 사육사는 소원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판다들 이야기를 제가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원하는 게 뭐니’ ‘어디가 아프니’ 들어 보고 싶습니다.” 상대의 마음에 가닿으려는 노력. 그것은 말이 통해도 서로 오해하고, 곡해하는 인간 세상에도 필요한 그 무엇 아닌가. 내가 바오 가족 ‘덕질’에 빠진 진짜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을 보며, 무심했던 동물권에 눈뜨게 된 것 역시 ‘덕질’이 내게 준 뜻밖의 선물이다.


('세계일보'에 쓴 칼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추석 극장가 승부수, 불안불안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