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샘과 누렁이

고흥 한달살기 에피소드 1

by 밤숲
금성과 달을 관찰하는 수연샘

'고흥에 어떻게 오게 됐어요?'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생각한다. 세 달 살기냐 한 달 살기냐. '원래는 세 달 살기인데, 프로그램 사정이 생겨 두 달 살기예요. 그런데 저는 뒤늦게 와서 거의 한 달 살기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확한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지역살이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 한 달 살기를 하니 나는 짧게 '고흥 한 달 살기 하고 있어요' 하고 소개한다.

쉼표를 찍듯 고흥에 왔다. 퇴사도 했으니 이후 행보를 고민해 보고자 했고, 자연에 둘러싸여 사는 삶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취미를 붙인 그림과 사진에 더 몰두해 볼 예정이었다. 입소(?) 첫날 부랴부랴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었다. '사람책'이라 불리는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참여할 체력이 못 되어 침대에 뻗었다. 이후 사람책 모임이 내 고흥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음날 늦잠을 자고 있는데(처음 자는 곳인데 늦게까지 잘 잤다), 점심 준비 소리에 일어나 룸메이트 수연샘과 인사를 했다. 수줍게 인사해 주신 수연샘은 수세미 열매로 설거지 수세미를 만들고, 환경을 생각하는 농업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특징을 잘 관찰해 별명 지어주는 재능이 있고 밭에서 나온 작물로 요리한다. 잠시 얘기 나눌 요량으로 소파에 앉으면 벌써 해가지고 저녁이 된다. 고흥에 오게 된 이야기, 환경 농업 이야기(우프, 변산공동체, 자자공, 퍼머컬쳐, 밭멍 등 수연샘이 알고 계신 관련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서로 남편들 이야기도 하고 보드게임도 가져와 게임도 했다. 그렇게 이동 장치가 없는 우리 두 사람은 숙소에 남는 날이면 날이 가도록 웃고 떠들고, 서로의 시간을 고흥에 새겨갔다.

숙소 앞에서 만난 마을 류씨 할아버지와 누렁이(내가 지은 이름)

일정이 없는 날은 마을을 돌아보고 산책을 하고 싶었다. 남쪽 끝에 있는 지역의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가 보지 못한 곳에 기대를 품고 낭만 있는 마을의 전경을 상상했다. 밭 매는 동네 어르신들, 낮은 천장의 오목조목한 집, 바람 불 때 들리는 나뭇잎 부딪히는 시원한 소리. 가방에 노트와 필기도구를 챙겨 목적지 없이 막연히 길을 나섰다.

왼쪽은 바닷가로 이어지는 쭉 뻗는 직선 도로였고, 오른쪽은 마을로 이어지는 구불한 길이었다. 풍경을 볼까 마을로 들어가 볼까 고민하다 마을길로 들어갔다. 낮은 집들 사이 바람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다섯 집쯤 지났을까 짧은 밭길이 나왔고 밭길 너머에 작은 강아지가 집을 지키듯 왕왕 짖었다. '어휴 귀엽네 집도 지키고' 기특한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집에서 한두 마리씩 강아지가 더 나오는 거다. 총 4마리가 왕왕 짖는다. 밭길 끝에 있던 집은 오른쪽에 있었고 내가 갈 길은 왼쪽 길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왼쪽 길로 지나가자는 마음으로 살살 걸어갔다. 목줄도 안 메어져 있는 개들이(강아지가 아니다) 짖으니 달려들까 겁이 났다. 왼쪽 길로 틀어 가는데 슬슬 내 쪽으로 짖으며 걸어오는 개들 때문에 밭 너머 보이는 하늘이며, 아기자기 집들이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 순간 내 신체가 성하길 간절히 바랄 뿐! 간신히 개들을 지나 마을의 한 중앙에 있는 정자로 몸을 피했다. 하.. 주여. 기도가 절로 나왔다. 이제 밭길로 돌아 숙소에 가야 하는데, 나를 지켜주소서! 예상보다 빨리 숙소에 갈 것을 마음먹고 해가 지기 전에 출발했다. 숙소 앞에 창고가 있는데 거길 지날 때 창고에 묶여있는 '누렁이'가 살벌한 눈을 하고 큰 소리로 짖는다. 내 평생 사람이든 동물이든 날 보고 저리 살기를 띤 생명체가 있었던가? 내가 숙소로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던 까만 눈동자의 누렁이의 눈은 꿈에 나올 법도 한 그런 야생의 눈이었다.

며칠 뒤 수연샘과 숙소 앞 산책을 하는데, 누렁이가 이장님의 개란다. 이장님이 밭일하실 때 꼬리를 흔들고 퐁퐁하며 따라다니는 모습이 영락없이 귀여운 강아지 모습이었다. 그날따라 누렁이의 눈빛이 순해 보여 용기를 내 다가갔다. 사실 수연샘이 먼저 가보시더니 얌전한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혀를 헥헥 하며 귀여움을 떠는 거 같아 내심 배신감이 들었다. 저번에 내가 지나갈 땐 왜 그렇게 사납게 짖어댄 거니! 원래 이런 애였음 진작 좀 그러지 으이구! 숙소 앞 누렁이는 안전하다는 안심에서 나오는 투정이다. 창고 앞 누렁이와는 오해를 풀고 이름을 붙여줬고, 마을 안 4마리의 개는 오해를 풀지 못해 '개들'이라 부르기로 했다. 야생의 모습을 내려놓고 서로 친해질 수 있을 때 그때 이름을 붙여 줘야지. 그 이후로 혼자서는 누렁이 창고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왠지 사나운 누렁이의 모습이 낯설 거 같아서. 너는 내게 계속 누렁이로 남아줘!


누렁이와 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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