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이 격의 없는 친근감 표시?
A:“목에 이거 왜 했어? 목에?”
B: “목이 아파셔요.”
A:“아파가지고?”
B:“예.”
A:“으응, 아침은 뭐 좀 드셨어?”
위 두 사람의 대화를 글로 보면, 대화를 나누는 둘의 관계가 무엇이라고 상상이 되나? 대화는 며칠 전 지방 방송 뉴스에서 나온 것이다. 뉴스 주제는 지역 소멸의 위기에 놓인 농촌에 대한 대책이었다. 민과 관이 협조해서 마을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였고, 그 속에 마을 활동가가 혼자 사는 동네 어르신을 방문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대화는 50대의 남자 활동가(A)와 어르신(B)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화면에 어르신의 얼굴은 흐리게 처리되었으나 80대로 보이는 할머니였다.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말투였다. 남성의 단단한 목소리와 여성의 힘없는 여린 목소리가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남자는 반말을, 어르신은 높임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남자가 ‘아침을 드셨어?’라고 ‘드시다’라는 경어를 썼지만, 이도 반쪽이었다.
두 분의 이런 말투 사용에 방송국은 전혀 문제를 못느꼈는지 그대로 방송되었다. 가족 같은 친근감의 표시로 반말을 사용한다는 변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경우라도 친근감은 상호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특히나 50대 남성이 80대 여성에게 하는 반말은 상당히 위압적으로 들렸다. 뉴스의 본래 취지가 무엇이든.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젠더화된 위계를 보는 듯하였다.
이런 사례는 주위에서 쉽게 목격된다. 최근에 무릎이 아파서 병원 물리치료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물리치료실의 주요 손님은 노인층이다. 그들을 돌보는 물리치료사들의 말이 귀에 들어온다. 물리치료를 받는 사람은 치료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치료사들은 환자들을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이 호칭만으로 관계가 복잡해진다. 환자는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치료사들은 환자를 사적인 관계로 끌어온다. 그 곳 병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 어르신을 부르는 호칭은 이래야 한다는 정석이 없다. 여성 물리치료사들은 애교가 섞인 소리로 말하지만 말투는 대부분 반말체이다. 특히나 환자들이 여성일 때는 더욱 그렇다. 환자들도 종종 그 말을 받아, 반말로 대응한다.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정형외과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보면 종종 진료실의 소리가 새어나온다.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높이는 어미를 줄이면서 일의 시간을 줄이려는 것일까.
손위 어른에게 반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역으로는 괜찮은가? 지난해에 한 편의점에서 70대 어르신과 20대 여성 직원 사이에 반말 공방이 있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손님이 우선 반말로 주문을 했고, 이에 직원이 물품의 가격을 반말로 답했다. 이에 화가 난 손님과 20대 여성의 언쟁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물리적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만약 편의점에 40대 이상의 남자가 일했다면 어땠을까? 70대 노인도 감히 반말을 사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반말은 나이뿐 아니라 성별, 신분 차이를 겨냥하면서 사용되고 있다.
사회적 관례가 된 이상한 말투
방송이나 실생활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노인을 어린이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어린애에게 하듯이 반말을 하고, 표정을 짓는다. 특히 어르신들이 돌봄 대상자가 되었을 때는 그렇다. 방송 카메라가 있는 자리에서도 저러는데, 평소에는 노인들이 마을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을까? 노인은 반말을 들으며 기분이 좋았을까? 어르신은 왜 이런 관계를 거부하지 않을까? 노인에게 자존심이 없을까? 편의점 직원처럼 대응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표시일까? 방송을 시청하면서, 병원에서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다.
노인들, 특히 가난한 여성노인들, 병든 노인들, 독거 노인은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반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잉여인간, 이등인간, 노인(NO人), 어른 어린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를 강요받고 있다. 자신의 취약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굴욕과 자기 혐오를 견디어 내고 있다. 그 속에서 '조용히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화를 내거나 감정을 드러내면 불편함으로 인해 마을 내에서 고립될지 모른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노인에게 고립은 생사와 연결된다. 하루하루 그런 일상이 반복된다. 시장에서, 병원에서, 마을에서 그런 관계가 굳어진다.
높임말은 어떤가? 표정 없이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본다. 격무에 시달리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의 높임말이 주는 냉랭한 분위기가 있다. 말을 받는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주지 않는다. 사실 이런 말투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래된 사회적 관습이다. 그러나 그 말투가 유독 누구에게 집중되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높임말은 형식적이 되고, 반말은 격의 없는 친절함으로 퉁치는 분위기가 언제부터인가 소외계층 주변에 스며들고 강화되고 있다.
말 속에 깃든 차별은 내용, 표현만이 아니다. 말투나 그 표정에도 차별이 숨어 있다. 또한 이런 모습은 예절 없는 일부, 일부의 비인권적 작태라고 한정지을 수 없다. 경제적 능력, 젠더 등이 얽혀진 한국의 신분사회에서, 노인은 노화로 인한 육체적 취약함이 더해져 신분사회의 밑바닥을 차지한다. 특히나 고령층의 일인가구 비율이 최근 20년 사이에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 유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인 가구의 절반 가까이는 빈곤 상태에 놓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 1인 가구 빈곤율은 남성 1인 가구에 견줘 훨씬 높았다. 나이가 많을수록 가난을 경험하는 경우도 많다”(-한겨레, 2023.4.19.)고 한다. 노인에 대한 존중은 부자 노인에게만 국한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마을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식사 대접이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5월에는 어버이날이 있어서 경로행사가 마을마다 열리고 있다. 고령층의 인구비중이 높다보니 고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 사업도 늘고 있다. 떠들썩한 그 행사와 사업 속에서 일하는 활동가에 대한 노인인권교육도 함께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격의 없는 반말 사용이 아닌 친절한 경어로 존중을 표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