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제14편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는 지중해에 면해 있는 프랑스 제1의 항구도시인 마르세유(Marselle)의 가난한 가정에서 1808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일을 하며 돈을 벌던 도미에는 공증인 사무실 급사, 서점의 직원, 법정의 사환 등의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을 드나들며 미술공부를 했다. 도미에는 알렉상드르 르누아르(Alexandre Lenoir, 인상파 화가 장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아님)의 수업을 들으며 바로크(Baroque) 회화에 영향을 받고, 벨리아르 공방에서 석판화(lithography) 기법을 배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그는 잡지에 만화를 기고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만화 또는 삽화를 게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루이 필리프 1세(Louis-Philippe ler)의 세금인상과 이를 지지하는 브루주아 계급을 비판하는 신문 삽화를 그린다. 이것이 도미에를 유명하게 만든 <가르강튀아(Gargantua)>이다. 그림에서 보면, 배불뚝이 흉측한 거인으로 묘사된 루이 필리프 1세가 서민들이 바친 제물을 끊임없이 먹고 있고, 그가 앉아있는 의자 밑으로 부르주아 계층의 사람들이 뭔가 서류 같은 것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서류들은 국왕이 자신을 지지해 준 부르주아 계급의 사람들에게 하사한 은혜를 상징한다. 가르강튀아는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의 <가르강튀아와 팡그리웰>이라는 풍자소설에서 거인 왕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매 끼마다 가축 수천 마리를 먹어치우는 자이다. 게다가 잠과 먹는 것에만 열중하는 인물이다. 프랑수아 라블레는 <수상록(The Essays)>로 유명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와 함께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꼽히는 사람으로,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로 유명한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가 '인간정신의 심연'이라고 칭송하기도 한 작가이다. 도미에는 이런 가르강튀아를 루이 필리프 1세에 비유하여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배만 부르게 하는 존재로, 그 밑에서 떡고물을 챙기는 부르주아 계급을 그 하수인이자 국왕을 떠받드는 자들로 비유한 것이다.
1930년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는 샤를 10세(Charles X)의 칙령 및 자유주에 대한 억압과 성직자와 귀족만 보호하는 반동 정치에 반대하여 일어난 프랑스 7월 혁명의 결과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도망가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이 된 것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은행가나 기업인, 자본가의 부르주아 계급을 비롯해 대지주 등의 지배계층을 옹호하며 국가의 부를 이들에게 집중되도록 하는 통치를 한다. 세금은 오르고, 경기는 불황이 겹쳐 서민들의 삶은 피폐해져 가고, 사람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미에는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는 그림들을 잡지에 싣게 되고, 1832년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된다. 출옥 후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무능과 모략, 기만과 서민들의 고통 등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들을 발표한다. 1932년 샤를 필립퐁(Charles Philipon)이 창간한 라 카리카티르(La Carcature)라는 주간지와 르 샤리바리(Le Charivari)라는 일간지에 그림을 싣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발표된 석판화 작품들이 도미에의 대표작들이 많다. 하지만 프랑스의 정부는 이를 가만 두지 않았고, 1985년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이 잡지를 폐간시켜 버린다. 도미에와 함께 이 잡지들에 그림을 그리던 화가로는 그랑빌(Grandville), 파울 가바르니(Paul Gavarni), 샴(Cham) 등이 있었다. 르 샤리바리는 1848년 다시 다시 재창간하게 된다. 이 일간지가 또 한번 미술사에 획기적으로 등장하는 때가 1874년 모네, 세잔,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카유보트 등이 주도하여 인상파의 시점이 된 낙선전에 대해 그해 4월 25일자에 미술 평론가인 루이 르루아(Louis Leroy)의 글이 실린 것이다. 앞서 모네에 대한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에서 따 온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The Exhibition of the Impressionism)>이라는 제목의 비평을 실었다. 그의 경멸과 조소에도 불구하고, 인상파는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고, 르루아는 인상파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이처럼 르 샤리바리는 도미에 뿐 아니라 인상파와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일간지였다.
역시 독재자는 자신을 비판하는 예술가들을 두고 보지 않는가 보다. 우리나라에서도 독재의 칼날이 서슬 퍼렇던 1980년대 소위 민중미술이라는 사회와 정치 비판적인 미술계의 흐름이 있었다. 이의 단초는 오윤, 임세택, 김지하 등이 1969년 결성한 '현실동인'으로부터 태동되어, 1970년대 김정헌, 오윤, 주재환, 성완경 등이 결성한 '현실과 발언'을 통해 지난 시기 한국 미술의 주류였던 모더니즘 미술을 비판하며 현실의 역사와 사회를 비판하는 흐름으로 대두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민족미술협의회가 1985년 결성되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그룹들이 생기게 된다. 요즘 개봉하여 흥행하고 있는 1987년 6월 항쟁을 배경으로 한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에서 볼 수 있듯이, 봇물처럼 터진 민중들의 민주화 열기를 통해 민중미술의 영향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러한 민중미술은 시대적 현실과 정치에 대한 비판적 표현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독재정권의 극심한 탄압으로, 작품이 압수되거나 파괴되고, 작가들은 끊임없는 삼엄한 통제와 검열과 함께 작가들이나 단체에 대한 위협과 사찰로부터, 심지어는 수배와 체포, 투옥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1985년 아랍미술관에서 열린 <20대의 힘전>이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되고 작가 19명을 연행하였고, 홍성담의 판화 2천여 점을 강제로 탈취한 데 이어, 1987년에는 제주에서 열린 <민족통일과 민중해방 큰 그림전>에 출품된 작가인 전정호에게 국가보안법에 의해 직영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으며, 신학철이나 홍성담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국가보안법 등의 이유로 구속되거나 실형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을 계기로 민중미술의 역사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민중미술은 사실적 묘사, 콜라쥬(Collage), 수묵화, 대형 걸개그림, 사진, 전통미술, 판화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고, 집단창작의 경향도 대두되었으며, 주제를 대담하게 표현하는 한국의 독창적인 미술로 평가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작가로는 오윤, 신학철, 주재환, 홍성담, 임옥상, 김정현, 최병수, 박불똥, 강요배, 이종구, 황재형, 이철수, 최민화 등의 작가들이 있다.
다시 도미에로 돌아가면,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도미에는 가난한 서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많이 제작하기도 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삼등열차(The Third-Class Carriage)>이다. 열차의 3등칸에 앉아있는 할머니와 젊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와 남자아이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사회정치적인 혼란기와 함께 산업혁명으로 인한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세력화와 부의 독점으로 인해 가난하고 착취받는 노동자를 비롯한 빈민계급이 확산되는 현실을 포착한 것이다. 그들의 무표정한 표정에서 볼 수 있듯이, 힘겨운 삶에 찌든 당시 서민의 모습을 잘 형상화한 것이다. 도미에는 억압받는 민중과 대중의 편에서 현실을 폭로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말년에는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나폴레옹 1세의 동생 가 주겠다는 훈장을 거부하고, 1871년 파리코뮌(La Commune de Paris)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운동으로 약 70일간 존재했던 정부로, 1917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lich Lenin)이 일으킨 볼셰비키 혁명에 의한 소련 공산주의 정부보다 훨씬 빠른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이다.
그가 비판한 대상은 국왕을 비롯한 부르주아 계급과 그 편에 선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장 앞에 소개된 그림 <두 변호사들(Two Lawyers)>에서 볼 수 있듯이 변호사, 판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이다. 이러한 법조인들에 대한 작품은 <두 변호사들> 외에도, 판사에게 손을 모아 간청하는 여인을 그린 <판사에게 간청하는 여인(Woman Pleading with a Judge), 승소한 변호사의 우쭐한 모습을 그린 <법정의 한 모퉁이(Grand Staircase of the Palace of Justice)>, 그들만의 리그를 표현한 것 같은 <대화하는 세 변호사(Three Layers Conversing)>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있다. 그만큼 요샛말로 하면 뇌물과 권력으로 직업윤리가 사라진 법조계가 적폐의 주요한 분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변호사나 법조인들은 사람을 단죄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의 판결에 따라 한 사람 또는 한 기업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변호사는 법률의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소송을 위임할 때 항상 비용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법 앞에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대의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소송을 하는 경우에 변호사 비용이 문제가 된다. 특허침해 소송에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변호사 비용은 패소자가 부담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부담의 금액은 변호사 보수의 한도를 규정하는 '변호사 보수의 소송비용산입에 관한 규칙'에 따르게 된다. 이 규칙에 따르면, 변호사 보수의 산정은 소송을 통해 얻으려는 경제적 이익을 금전으로 환산한 금액, 즉 '소송목적의 값'에 따라 산정한다. 하지만, 이에 따르면 승소한 사람이 패소한 당사자로부터 보전 받을 수 있는 비용은 실제 지출한 비용에 비하면 매우 적다. 그나마 지난 2018년 1월 4일 대법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 규칙을 개정하여 소송목적값을 2천만원, 5천만원, 1억원, 1억 5천만원, 2억원, 5억원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소송비용에 변호사 보수 비율을 달리 정하며, 금액을 인상한다고 한다. 이에 따라 1억원의 소송목적값에 산정되는 변호사 보수는 기존의 480만원에서 740만원으로 인상된다고 한다. 이 규칙은 입법예고를 거쳐 2018년 4월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소송에 따른 비용부담이 문제가 되어 소송을 주저하는 특허권자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나아진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변호사 비용의 부담에 대해 미국의 경우는 어떨까?
미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변호사 비용(Attorney fee)은 각자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승소했다고 승소자의 변호사 비용을 패소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아니다. 특허소송의 경우 미국 특허법(35 U.S.C) 제285조에 규정이 있는데, 여기에는 "The court in exceptional cases may award reasonable attorney fees to the prevailing party."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각자 자신의 소송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나, 예외적인 사건(exceptional case)의 경우에는 패소자가 승소자의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도록 되어 있다.
패소자가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여야 하는 예외적인 사건은 판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미국 소송의 특징 중 하나는 배심원 재판(jury trial)이 많다는 것이다. 미국의 수정헌법 제7조에는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송에서 당사자는 배심재판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규정되어 있어, 소송의 당사자(원고 또는 피고) 중 하나만이라도 판사 재판(bench trial)이 아닌 배심원 재판을 받겠다고 하면 배심원 재판으로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계적으로 배심원 재판의 경우가 원고의 승소율도 높고, 손해배상액을 인정하는 규모도 더 크기 때문에 특허권자는 배심원 재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참고로 배심원은 적어도 6명 이상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현사재판에서는 12명의 배심원이 참여하는 소(小)배심과 20명이 배심원이 되는 대(大)배심으로 나뉘고, 민사소송의 경우 연방법원이면 배심원이 6명 이상 12명 이하로 구성된다. 2014년 삼성과 애플간의 소송에서 캘리포니아 연방지방법원에서 선정된 배심원은 10명이었다.
그러면 변호사 비용 전가 규정인 특허법 제285조를 적용하여 변호사 비용을 패소자에게 전가하는 결정은 누가 해야 할까? 판사 재판의 경우에는 판사가 하면 되니 문제가 없지만, 배심원 재판에서는 배심원이 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판사가 해야 하는지가 문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허침해소송의 침해 여부 판단이나 손해액(damages) 산정은 배심원단이 결정하게 된다. 또한 고의침해(willful infringement)인지 아닌지도 배심원단이 판단하게 된다. 고의침해가 인정되면 미국 특허법상으로 3배까지 손해액을 증액할 수 있는데 이를 증액할 것인지, 증액한다면 얼마나 할 것인지(3배까지 증액할 수 있으므로, 재량에 따라 1.5배 또는 2배 등 3배를 넘지 않는 선에서 결정한다)는 판사가 판단하게 된다. 즉, 고의침해 여부는 배심원단이 판단하되, 얼마나 증액할지는 판사가 판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소송에서는 변호사 비용을 패소자에게 전가하는 예외적인 사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배심원 재판에서는 배심원단이, 판사재판에서는 판사가 하는 것인데, 특허소송에서는 주로 배심원 재판이 대다수를 차지하므로, 거의 배심원단이 하게 된다.
그러면, 변호사 비용을 전가할 수 있는 예외적인 사건은 어떤 기준에 의해 판단할까?
이와 관련한 판례 중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2014년 판결한 옥탄 피트니스 사건(Octane Fitness, LLC v. Icon Health and Fitness, Inc.)이 있었다. 특허권자인 옥탄 피트니스는 세계 최대의 운동기구 메이커인 아이콘 헬스 앤 피트니스사가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다. 이 소송에서 옥탄 피트니스가 승소하게 되고, 이를 근거로 변호사 비용의 지급을 청구하게 된다. 이에 지방법원은 이를 거부하게 된다. 판례에 따르면 변호사 비용을 패소자에게 부담시키는 '예외적인 사건(exceptional case)'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1) 객관적으로 침해자가 자신의 행위가 유효한 특허권의 침해가 될 것이라는 높은 가능성(high likelihood)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위를 했다는 것과, (2) 주관적으로 침해의 위험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을 특허권자가 입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특허권자의 입증은 명백하고 설득력있는 입증(clear and convincing evidence)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입증정도는 일반적인 민사소송의 입증정도인 그렇다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보다 높은 가능성(51% 이상의 가능성만 보이면 됨)을 보이는 증거우월의 입증(preponderance of the evidence)보다 높은 정도의 입증이다. 이 판례가 씨게이트 사건(In re Seagate Technology, LLC)이었다. 위의 두 가지 요건을 입증하되, 그 입증의 정도도 일반적인 민사소송의 입증보다 높은 정도를 요구함으로써 변호사 비용을 전가할 수 있는 '예외적인 사건'은 그야말로 예외적인 소수의 사건에만 인정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옥탄 피트니스의 지방법원 판결은 위의 두 가지 요소 중 침해자의 행위가 객관적인 근거 없음(objectively reckless)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침해행위를 했다는 것을 특허권자가 입증하지 못 했다고 판단하여 변호사 비용을 아이콘에 부담시켜 달라는 옥탄 피트니스의 청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옥탄 피트니스 사건에서 미국연방대법원은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었다. 지방법원의 판결에서 판결한 기준 중 '객관적인 근거 없음'이라는 요소는 나머지 하나의 요소인 주관적인 인식이 있었어도 객관적인 요건을 입증하는 것에 실패하면 변호사 비용을 전가시킬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대법원의 판단은 이러한 객관적 요건을 특허권자가 반드시 입증하지 않아도 주관적인 요소를 입증하면 그것으로도 변호사 비용 전가 판결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처럼 엄격하게 주관적 요건과 객관적 요건을 모두 특허권자가 입증하여야만 한다는 것에서 어느 정도 입증할 부분을 완화한 것이다. 게다가 이전 판결과 달리 그 입증의 정도도 일반 민사소송에서 요구하는 정도인 증거의 우월성(preponderance of the evidence) 정도로 완화하여 원고의 입증책임을 가볍게 하였다. 실제로도 옥탄 피트니스 판결 이전과 그 이후에 법원에 의해 허가된 변호사 비용 전가가 허용된 사건이 크게 늘게 된다. 이전에는 "어차피 청구해도 잘 인정되지 않아, 굳이 청구하지 않겠다"던 특허권자의 태도도 많이 변화하여 변호사 비용을 청구하는 비율도 크게 늘었다. 게다가 2017년 델라웨어(Delaware)에서 진행된 특허침해 소송에서 법원은 무려 100만 달러에 이르는 변호사 비용을 패소자에게 부과하는 등, 특허침해소송에서 패소자의 부담은 손해배상뿐 아니라, 상대방의 변호사 비용도 상당한 금액을 부담하여야 하는 경우가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이렇게 변호사 비용을 패소자에게 부담시키는 경우는, 미국 법원의 민사소송 뿐 아니라 미국 특허심판원(PTAB)에서 진행하는 당사자계 재심사(Inter Partes Review; IPR)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허방어펀드의 하나인 RPX는 AIT사의 특허 2건을 무효시키기 위한 IPR을 신청하여 무효가 된 바 있는데, 이 사건에서 변호사 비용이 문제된다. IPR 과정에서 피신청인(특허권자)이 특허심판원의 특정 정보에 대해 영업비밀 등의 이유로 외부에 공개하거나 유출하지 말라는 심판원의 보호명령(protective order)에도 불구하고, AIT사가 자신의 외부 변호사(이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가 아님)에게 비밀정보를 알려주게 된다. 이에 대해 특허심판원은 보호명령을 위반한 AIT사로 인해 신청인(petitioner)인 RPX가 피해를 봤으므로, 변호사 비용으로 13,559 달러를 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은 미국 특허법 제285조의 변호사 비용 전가 규정을 특허심판원의 절차에도 적용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면, 중국의 경우에는 어떨까?
지난 2016년 12월 8일 중국의 베이징 지식재산법원은 워치데이터(Watchdata)가 헹바오(Hengbao)를 상대로 한 특허침해소송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유에스비 키(USB key)와 관련된 특허 제200510105502호가 문제가 되었는데, 이 특허의 청구범위는 유에스비 키 자체와 이에 대한 온라인상에서의 송금을 위한 인증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법원은 원고에게 손해액과 함께 변호사 비용도 배상받는 것으로 판결을 하였다. 손해액의 계산은 4,900만 RMB(약 80억원)였고, 이는 중국 특허침해소송 중 세번째로 규모가 큰 것이었다. 법원은 [피고의 매출액 X 원고의 이익률]로 손해액을 계산하였다. 법원은 피고의 고객인 15개의 은행에 대해 USBkey의 구매액을 요청하였는데, 12개의 은행은 이를 제출하였고, 3개의 은행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법원은 원고가 제출한 자료에 따라 자료 제출을 거부한 3개 은행의 구매액을 추정하여 약 858,000 RMB(약 1억 4천만원)를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총 손해액이 4,900만 RMB에 이른 것이다. 변호사 비용과 관련하여, 법원은 100만 RMB(약 1억 6,400만원)의 변호사 비용을 인정하였다. 이 변호사 비용은 원고가 청구한 금액이며, 법원은 이를 모두 인정한 것이다. 법원은 변호사 비용과 관련하여 로펌이 보통 시간당 비용을 청구하고 있고, 사안의 복잡성과 업무의 양을 보면 원고가 로펌과 계약한 비용에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변호사 비용의 산정에 시간당 비용을 인정한 것은 중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위에서 한국과 미국, 중국의 특허침해소송에서 승소자의 변호사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를 살펴본 바와 같이, 각 나라별로 변호사 비용을 패소자에게 부담시키는지 여부 및 그 기준은 상이하다. 따라서 특허침해소송을 진행하는 경우 이러한 각 나라별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이를 감안한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