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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emeetskun Apr 16. 2021

코로나의 시대, 미국에서 대학원생으로 살기

하버드에서의 일 년은 내 인생의 그 어떤 해보다 짧고 굵었다.

아마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아무것도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먼길을 돌아 드디어 정말 하고 싶던 공부를 제대로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을 하고, 돈을 모으는 재미가 한창 쏠쏠하던 20대 중반의 어느 날 나의 해맑은 남자 친구는 청혼을 해왔다. "너 결혼이 어떤 건 줄은 알고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 질문은 비단 남자 친구에게만 던져진 물음표는 아니었다. 나도 몰랐다. 그러나 짧은 순간에 한 가지 어렴풋이 계산이 섰던 사실은 결혼을 해서 함께 살려면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이제 막 시작한 남자 친구가 공부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오거나,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전부터 남자 친구가 어떤 시간과 고민을 거쳐 다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다면 내가 유연성을 발휘해주고 싶었다. 사람에 대한 확신은 그간 두터워져 있었지만, 딱 한 가지 두려운 것이 있었다. 내가 이 친구와 지금 결혼을 하면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내가 이 친구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려면 일단 내가 나인채로 자유롭고, 행복하고, 나 자신이 마음에 들어야 한다. 미국으로 가야 한다면 거기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혼을 하고 얼마 후 친한 친구가 주변에 결혼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보니 고민도 갈등도 많던데 나는 왜 그런 얘기를 하나도 안 했느냐고 물어왔다. 결혼식 준비보다는 결혼 후에 미국으로 가서 펼쳐질 미래가 너무나 막막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실제로 결혼 준비와 대학원 준비를 동시에 시작한 터라 GRE 공부를 하다가 뛰쳐나가서 웨딩촬영을 하는 시간에도 공부할 시간이 줄어든 것 같아 마음을 졸여야 했다. GRE 학원에 가보니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홀로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는 미혼의 사람들, 그리고 이런저런 상황들과 타협해가며 공부하고 있는 기혼의 사람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 어정쩡하게 있었다. 결혼식 이틀 전에 대학원 원서를 접수했다.


몇 달 후 대학원 합격 발표가 났다. 정말 기뻤다. 일을 할 때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래 잊고 있던 종류의 반가운 에너지가 샘솟았다. 그때는 몰랐다. 코로나의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는 걸.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아무리 오래 가도 몇 주, 몇 달이면 잠잠해지겠거니 하던 짐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빗나갔다. 5월 즈음되니 학교에도 비상이 걸렸다. 미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이 심각해져 캠퍼스를 열지 못하게 되는, 그 당시에만 해도 말도 안 된다 여기던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강의와 사이버 대학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하버드는 오랜 시간 캠퍼스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얼굴을 맞대로 배우는 학습 방식을 끈질기게 고집해왔기에, 캠퍼스를 열지 못할 경우에 미처 대비해놓지 못했다. 결국 학교는 코로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캠퍼스를 폐쇄하고, 모든 강의는 온라인으로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기대에 부풀어있던 학생들의 실망과 반발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나 역시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렇지만 모두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시해야 하는 학교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평소 고민도 꿈도 여의주처럼 입에 물고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는 나이지만, 그때만큼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부모님께 급하게 SOS를 쳤다. 아빠는 예로부터 전쟁통에도 공부할 사람들은 다 공부를 했다며, 일단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하는 게 맞다고 하셨다. 엄마는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힘들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나의 상황만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더 이상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모두 애쓰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나의 중심을 잡고 이 시간 잘 흘러가 보라고. 흙탕물처럼 어지러웠던 내 마음의 불순물들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 교실에서든 컴퓨터 앞에서든 내가 마음 단디 먹으면 돼!"


하버드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은 보통 1년이다.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 학교 어드바이저에게 급하게 연락이 왔다. " 가을학기에 미국에 있어?" 미국에서 공부할 거라고 하니 이번에는 비자가 문제다. 캠퍼스를 열지 않게 되어 올해는 국제학생들에게 학생비자를 발행해줄  없는데, 학생비자가 있는 남편의 배우자 신분으로 미국에 체류하게  나는 한국에서만 풀타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건  무슨 골치 아픈 변수인가, 어지러웠다. 진즉에 학교생활을 1년으로 예상하고 준비했던지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 법적으로 파트타임으로만 공부할  있고, 따라서 학교생활은 2년으로 늘어난다고 했다. 나와 같은 상황의 학생들이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매년 시간이 빨리 간다고 지겹게 말했으면서도 갑자기 늘어난 학교생활은 시작도 전부터 너무 길게 느껴졌다.    간절한 마음으로 긍정 회로를 돌려보았다. "그래, 바쁘게 쳐내는 공부가 아니라 시간 여유를 갖고 깊이 공부할  있는 기회야." 정신승리도 한두 번이지... 제발 이제 그만


그렇게 어찌어찌 겨우겨우 시작한 학교생활이 벌써 1년이 흘렀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정말 아무것도 내가 생각했던 대로 전개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자꾸만 계획과 어긋나는 상황,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실망스러워진 상황에서 끊임없이 최선을 찾아내야 했고, 결국 찾아냈다. 찾아냈다기보다는 매번 마음을 빠르게 새로이 먹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아마 평생 써먹을 무기가 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초래한 아쉬움과 어려움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학교 친구들과는 컴퓨터 화면 너머로도 금세 마음이 오갔다. 기술혁신교육을 전공하는 나에게 지난 1년은 다양한 수업들을 들으면서 교육과 기술의 무수한 접목 사례와 시행착오,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직접 보고, 체험해볼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구체적인 코로나 시대의 온라인 수업 후기는 다음 포스팅에:) 온 세상에 먹구름을 드리운 코로나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슬슬 물러날 기미가 보이고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파트타임으로 전환해야 했던 나에게 남은 학교생활 1년은 어쩌면 캠퍼스에서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직접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모두 경험해보고 비교해볼 수 있게 되면 그 또한 가치 있는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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