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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뇨타 Feb 25. 2023

집에서 전 세계 외국인을 만나는 방법

온라인 한국어 선생님의 수업 일지 혹은 일기

한국어를 가르친 지 7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부터 온라인으로 전 세계의 다양한 곳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요. 그동안 제가 집에서 만난 외국인도 500명쯤 되고, 한국어 수업 횟수도 6,000번을 넘겼네요. 그러는 사이 외국인 학생들을 직접 만나서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저만의 한국어 사이트가 생겨서 기쁜 순간도 있었지만 힘든 시기도 있었습니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 블루인지 매너리즘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슬럼프에 빠져서 연애도, 가족 관계도, 가벼운 일상생활도,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도 다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모든 게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부쩍 저의 학생들이 한 명 한 명이 흥미롭게 느껴지고, 수업이 즐겁기만 합니다. 학생이 아니라 제가 변화했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전에 살던 곳보다 자연과 도서관과 친구가 가까이에 있어요. 사는 곳이 이렇게 중요한 줄 몰랐어요. 코로나 때 집에 콕 처박혀서 재택근무만 하다 보니 우울증이 찾아왔나 봅니다. 어느샌가 슬럼프를 극복하고 매일 아침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기운이 난 김에 내 학생들과 온라인 한국어 선생님으로서 삶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이천이십삼 년 이월 넷째 주 수요일


1. 오늘 아침 10시에 캐나다에 사는 학생과 수업했다. 이 학생은 되게 수줍음이 많은데, 직업은 배우이다. 다음 달에 미국 방송 채널 AMC에서 첫 방송을 하는 드라마 'Lucky Hank'에서 조연 배우로 나올 예정이다. 보통 배우라면 아주 성격이 활발해야 많은 사람 앞에서 연기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학생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타는 학생 2명 모두 직업이 배우이다. 나도 부끄러움 하면 어디서 지지 않을 정도로 항상 긴장하고 언제 어디서나 얼굴이 시뻘게지는 사람인데, 연기를 배워 보면 어떨까 싶어서 동네 연기 학원을 검색한 적도 있다.


아무튼 이 학생이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K-pop이다. 몇 달에 한 번씩 한국 아이돌의 콘서트에 가고, K-pop 노래에 맞춰 춤 공연을 한다. 오늘은 나에게 자기 팀 춤 영상을 보여줬다.

성능(performance)는 공연이라는 단어를 잘못 쓴 것이다.

그녀는 직업도, 친구도, 취미도 워낙 많아서 우리는 수업 시간 내내 일주일을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업이 다 끝나버린다. 문법 수업을 신청했는데, 수다를 떠느라고 진도가 안 나간다. 물론 학생이 한국어를 말할 때 틀린 표현을 고쳐주거나 더 나은 표현을 알려 주기는 한다. 하지만 아직도 배워야 할 게 산더미라 조금 걱정을 하면서도 그녀의 일상이 재미있어서 계속 수다를 떨게 된다. 다행히, 학생이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불만이 없는지 계속 수업을 신청해 준다.


우리가 만난 지 1년 다 되어 가는데, 오늘 그녀에 대해 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바로 즉흥 코미디 공연을 10년 동안 해 왔다는 것이다. TV 드라마 촬영만 하는 줄만 알았는데, 즉흥 코미디까지 하다니? 부끄러워하는 모습 안에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구나. 아무것도 안 하는 나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구나. 나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다가도 학생이 다음 주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주려나? 기대하면서 수업이 끝난다.


2. 오전 수업이 11시에 이미 다 끝나버렸다. 보통 나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는 수업이 없어서 산책하러 나간다. 그런데 오늘은 수업 사이에 다섯 시간이나 여유가 생겨서 신났다. '빨리 밖에 나가야지~!'하며 고양이 똥을 치우고,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하고, 거실 바닥을 청소하고, 다 된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기 돌렸다. 점심으로 도토리묵밥을 후다닥 해 먹고, 커피믹스를 호로록 들이켠 후에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 내내 봄 햇살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설렜다.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그림 교재를 만들고 싶어서 시작했던 그림 모임에서 만났던 사람. 늘 모임 사람들과 함께해 한 번도 단둘이 길게 대화해 본 적 없었던 사람. 나는 최근에 이사했는데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그 분이 살고 있단 걸 알게 됐다. 마침 그 분이 회사를 그만두고 예술 활동에 전념하기로 했단다. 오, 평일 낮에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우리는 오후 2시에 도서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옥상 테라스에서 수다를 떨고, 간식을 먹으면서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한낮에 만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생겨서 기뻤다.


3. 저녁 7시 초등학교 영어 원어민 교사인 영국 학생과 수업하기로 했는데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도 노쇼(No-show)를 하지 않았던 학생이라, 지난주에 학생에게 보냈던 메시지 때문일까? 싶어서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학생은 한국에 온 지 6년이 지났다. 그동안 Duolingo 같은 앱도 쓰고, 언어 교환도 해 봤지만, 독학으로는 한국어 실력이 늘지 않아서 결국 수업을 듣게 되었다. 나름 열심히 하고 있고 1년 동안 한국어 실력이 늘어서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최근 그녀의 한국인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왜 한국어 실력이 늘지 않느냐고 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속상한 마음을 숨기고, 열심히 한국어 공부할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수업 후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냈다.


학생을 격려하기 위해 썼던 메일

이메일 내용은 대충 "나는 OOO 씨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작년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OOO 씨가 하는 실수는 누구나 하는 흔한 실수예요. 그리고 항상 열심히 공부하니까 만날 때마다 기뻐요. 진짜 한국인처럼 말하려면 배워야 할 게 아직 너무 많지만, 우리는 실력이 늘고 있으니까 저는 별로 걱정 안 해요. 한국인 친구가 많이 있다면 실력이 더 빨리 늘 수 있을 텐데, 지금 속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한국어 실력을 늘리고 싶으실 테니까 제가 숙제를 하나 더 줄게요. 이 숙제를 하면 혼자서 실수를 고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였다.


원래는 바로 답장이 오는 사람인데도 답장도 없고, 이번 주 수업에 나타나지 않기까지 해서 '혹시 내가 조언해서 기분이 상했나? 어차피 본인 스스로 모르는 이야기도 아닐 텐데, 괜히 꼰대 짓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터넷 문제 때문이었다. 다양한 시도를 해 봤지만 결국 잘 안돼서, 우리는 수업을 다음 날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서 그녀에게 이메일 답장을 받았다. 다행히 내 말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나 보다. 한시름 놓았다.

학생에게 받은 답장


4. 오늘의 마지막 수업은 저녁 8시 동남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아일랜드 사람과의 발음 수업이었다. 처음 수업 신청이 들어 왔을 때, 수업받을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다. 왜냐하면 프로필 사진에 너무나도 아일랜드 사람답게 초록색 옷에 맥주잔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극 내향인이라 성격이 너무 밝은 사람과 수업하면 기가 쉽게 빨리기 때문에 가끔 프로필을 보고 수업을 거절할 때도 있다.


그리고 유튜버일 것 같았다. 나는 한국어 수업을 콘텐츠로 사용하고 싶은 유튜버와 마찰을 빚은 적이 있어서, 비슷한 요청을 하는 유튜버의 수업 신청은 모두 거절해 왔다. 그런 유튜버인 줄 모르고 수업을 한 적도 있었지만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과 유튜버로서 그들이 원하는 게 좀 다른 듯했고 서로에게 흥미를 못 느껴 다음 수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그냥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다. 그래도 최근에 이사해서 가구를 많이 샀더니 다음 달 카드값이 걱정되기도 하고, 나와 성향이 180도 다른 사람이라면 배울 점이 있겠다 싶어서 수업 신청을 받아 보았다.  


이 학생은 처음 만나자마자 여느 사람들과 좀 다르게 느껴졌다. 한국어 초급자인듯 초급자가 아닌 초급자 같은 너. 그리고 유튜버가 맞긴 맞았다. 그 학생이 알려준 채널을 검색해 보니까 언어 공부로 TED에도 강연 나갈 만큼 언어 공부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언어에 파친 놈.. 언어 덕후...너무 좋아...


이 사람이 좀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듣기 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아, 보통 한국 콘텐츠를 많이 접한 학습자들은 말하기에 비해 듣기 실력이 좋은 편이긴 하다. 근데 이 학생처럼 이제 막 한국어를 접한 (티가 나는) 사람이라면 듣기 실력이 썩 좋지 않다. 아는 표현을 듣고도 이해하는 데 한참 걸리거나 포기해버린다. 하지만 학생에게 수준에 맞는 질문을 던졌을 때 계속 곧바로 알아들었고, 학생은 떠듬떠듬 한국어로 대답했다. 나는 순간 입이 벌어졌다. 학생에게 어떻게 이렇게 (실력에 비해) 듣기를 잘하는지 물었더니 이번 주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하루 종일 공부를 한다고 했다.


언어에 진심인 사람


수업이 끝난 후 패키지 수업(한 번에 수업 5개) 신청이 들어왔다. 그래도 일단 나는 혹시나 이 사람이 내 수업을 함부로 녹화해서 올리거나 헛소리를 하지 않을까 싶어 이 사람의 유튜버 채널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정말로 언어를 사랑하는 polyglot(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맞는 것 같아서 수업을 계속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꼭 한국어 실력을 늘리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본능적으로'라는 노래의 가사가 스쳐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넌 나의 사람이 된다는 걸

처음 널 바라봤던 순간 찰나의 전율을 잊지 못해

좋은 사람인진 모르겠어 미친 듯이 막 끌릴 뿐야




오늘도 참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이 많았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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