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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뇨타 Feb 26. 2023

집에서 전 세계 외국인을 만나는 방법 - 고양이와 함께

온라인 한국어 선생님의 수업 일지 혹은 일기

이천이십삼 년 이월 넷째 주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려고 거실에 나왔다가, 자기에게 오라며 나를 부르는 우리 집 둘째 고양이 고로를 발견했다. 얼른 달려가서 머리를 쓰담쓰담해 주고 배를 문질러 줬다. 아마 새벽 6시쯤 깨서 그때부터 인간이 자기를 예뻐해 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기분 좋아 고로롱대길래 계속 예뻐해 주다 보니까 첫 수업 전까지 세수하고 화장할 시간이 부족해졌다. 하지만 이 몰캉몰캉하고 따뜻한 고양이의 몸에서 손을 떼기가 싫었다. 웹캠은 실제 얼굴보다 뽀얗게 나오기 때문에 세수 좀 안 하고, 이 좀 안 닦아도 학생은 모를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 준비로 눈꼽이나 떼고 머리나 빗자!하며 수업 직전까지 고양이를 만져줬다. 

둘째 고양이 고로


고로는 사람을 좋아해서 집에 손님이 오면 손님 곁에서 떠나지 않는 대접냥이다. 아마도 이 기술은 길거리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으려고 발달시킨 생존형 애교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맨 처음에는 고로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기보다는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서 고로를 챙겨줬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는 고양이가 세 마리인데, 고로가 화면에 등장했을 때 외국인 학생들의 반응이 가장 뜨겁기 때문이다. 왜인지 모르게 셋 중에 가장 인기가 많다. 인기남인 고로는 보통은 내가 수업할 때 뒤에서 이런 자세로 있다.

숨은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다.


전기 장판에 녹은 고로와 바둑이. 사실 다른 고양이 두 마리도 정말 귀엽다.


고로가 가장 인기가 많을 뿐, 세 마리 중 하나가 보이면 학생들은 대부분은 반가워한다. 그리고 자기 고양이도 나에게 인사시켜 주거나 사진을 보여 준다. 우리는 서로의 고양이들을 귀여워하면서 수업도 잊은 채 고양이 이야기를 할 때도 많다. 그래서 가끔 "얘들아~ 일하러 가자. 오늘 새 학생이야. 영업해야지?"라며 방으로 안고 들어간다.


1. 오전 9시. 아무튼 나는 씻지 않은 채로 베트남계 미국인 학생과 수업했다. 이 학생의 직업은 간호사다. 처음에는 병원에 오는 한국인 환자를 위해서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었다. 그리고 몇 번 수업을 듣더니 사라졌다가 몇 개월 전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올봄에 가족들과 한국으로 여행 오기 전에 유용한 한국어 표현을 배우고 싶어 한다. 나는 바로 "Survival Korean Course"를 시작했다. 우선 학생들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을 소개하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돈을 내야 하지 않겠냐며, 어려운 숫자를 가르치는 식이다. 오늘은 학생이 나를 한국에서 만나고 싶다고 해서 올해 4월에 만나기로 했다. 서울에서 만날지 부산에서 만날지 아니면 학생이 내가 사는 전주에 올지 모르겠다. 서울과 전주 가이드 경험은 많은데, 부산은 가이드를 해 본 경험이 없어서 자신이 없다.


2. 낮 12시. 지난 글에서 말했던 아일랜드 유튜버와 계속 수업을 이어갔다. 우리는 한 주 동안 일곱 번의 수업을 하기로 했다. 사실 똑같은 학생을 매일매일 만난다는 게 난 좀 부담스럽지만, 다행히 말하기 수업 아니고 발음 수업이다. 게다가 이 사람과의 수업 시간은 늘 30분밖에 되지 않아서 괜찮다.


3. 점심시간. 내가 수업하는 동안 남자친구가 인스턴트 팟으로 삼겹살 통 삼겹구이를 만들어 놨다. 우리는 둘 다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삼시 세끼를 같이 먹는다. 전에는 둘 다 바쁘니까 자주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곤 했었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동네에 길고양이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오토바이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우리 마당에서 본 고양이들에게 한 놈, 두시기, 석 삼, 너구리, 오징어...와 같은 Korean informal counting system 써서 이름을 붙이다가 포기했을 정도로 길냥이가 많다. 그래서 배달 음식을 안 먹기로 했다. 그랬더니 남자친구가 요리하기 시작했다. 오늘 점심엔 삼겹살과 각종 야채를 구워서 와인과 함께 먹었다.

마당에 사는 고양이들
덕분에 배달을 끊었다.
태어난 시기는 다른데 엄마는 같은 아이들



나는 우리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마당냥이들도 학생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4. 오후 4시. 영국 사람과 한국어능력시험(TOPIK, Test of Proficiency in Korean)을 준비했다. 학생은 군인인데 출근하기 전에 달리기하거나 한국어를 공부한다. K-pop과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데다가 언어 공부도 좋아해서 항상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다. 하지만 늘 일이 바쁘고 해외에 자주 나가다 보니 수업을 듣다가 말다가 한다. 학생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서 목요일 오후 4시는 늘 이 학생을 위해서 비워 놓는다. 이번 달에 다시 돌아와 줘서 기쁘다. 


5. 오후 6시. 러시아 사는 미국인 할아버지와 수업했다. 내가 처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2016년 12월부터 지금까지 같이 해 오고 있다. 나의 가장 오래된 학생이다. K-drama와 가수 소향을 좋아하신다. 오늘은 배우 공유가 출연한 드라마 제목이 헷갈리셔서, 나에게 공유가 '떡볶이' 연기를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네?? 잠시 생각을 하다가 '떡볶이'가 아니라 '도깨비'라고 알려드렸다. 


7. 저녁 7시. 어제 인터넷 문제로 만나지 못했던 학생과 다시 만났다. 일주일 동안 한국어를 전혀 공부 안 했는지 아니면 오늘 하루가 힘들었던 건지 일주일 새 한국어 실력이 훅 줄었다. 습관적으로 영어를 직역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저는 오늘 많이 걸었어요."라고 해야 하는데 "저는 걸음 많이 했어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학생이 직역할 때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말해줘야 했다.


8. 밤 10시. 싱가포르에 사는 홍콩 사람과 수업이 있었다. 아시아 학생들은 평일에는 주로 퇴근 후에 수업을 듣거나 주말에 듣는데, 오늘은 일이 많아 수업이 취소됐다. 밤 수업은 나도 학생도 피곤하니까 수업이 취소되면 오히려 좋아~


오늘 만난 사람들도 참 배울 점이 많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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