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원하는 걸 말해봐
새로운 인사담당자 K는 나와 같은 계열사에서 왔고 본인도 워킹맘이라며 친근감으로 다가와 나의 사정을 동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조사는 끝까지 간다고 장담하던 노무사는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었단다. 지금 이 시점에 회사 노무사에게 직장 내 갑질보다 더 급한 프로젝트가 뭐가 있었을까.
듣자 하니 K 또한 계열사에서 에이스로 꼽혀 지주에 넘어온 지 일 년이 채 안됬다고 한다. 노무사를 포함해 사측 관계자는 절대 믿지 말라던 주변 사람들 말을 이번에도 또 듣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인사위원회를 열려고 한 게 아니다. 인사에 도와달라고 찾아갔을 뿐인데 곧바로 회사 노무사를 연결했고, 노무사에게 경위서를 전달했더니 녹취나, 카톡 캡처 등 증거를 가져오라 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미팅할 때마다 녹음을 하고 다니는 회사원이 얼마나 될까.
증거가 그렇게 중요하다더니, 이제 정말 내가 불리한 상황이 된 걸까. 카톡과 사내 메신저를 뒤지고 또 뒤져 떨리는 손으로 캡처를 하고 정황증거로 냈다. 하여튼 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고.
K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일이 이렇게 흘러왔는지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도대체 인사에서는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되어있는 걸까.
이제부터라도 바로 잡자고 한다. 인사 내부에서 최초 보고가 올라가자마자 인사 조직장이 T에게 이 건에 대해 귀띔을 했고, T는 놀라서 곧바로 인정하며 나에게 사과를 하겠다고 했단다. 본인 잘못을 바로 인정했다니 예상했던 시나리오 중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전개였지만,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놀라기도 했겠지, 밟으면 밟히는 줄 알았겠지.
내가 미친척하고 정말 인사위원회를 열면 T는 결국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어쨌든 계약직인 임원 자리는 위태로워진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시나리오에서는 누가 더 잃을게 많을까. 애 잘못 건드리지 말고 정서관리 잘해서 다른데 보내라고 윗선에서 조언을 받은듯하다. S대 법대 출신인 T는 똑똑하니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노무사 역시 T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하긴 했지만 사과는 처음 듣는 얘기 었다. 그는 아주 난처한 어투로 T가 오해를 풀고 싶다고 하는데 만나겠냐, 하지만 만남과 상관없이 인사위원회는 열릴 거라고 했다. 이때까지 나는 인사 노무사도 내 경위를 보고 뭔가 잘못됐다 생각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사건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내가 하는 거였다…)
참고로 직장 내 괴롭힘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지속적으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기준이다. 나도 나름 여기저기 찾아보고 내 상황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확신을 가진 터였지만 그 이후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그럼 T를 지금 만날 이유가 뭐지?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게 없고, 그도 모든 조사와 면담을 마치고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보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노무사는 나의 거절을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이 동조했고, 힘들면 회사 상담 센터가 있으니 가보라는 조언까지 잊지 않았다. 몇 차례 전화통화에서 노무사는 T 뿐만 아니라 Y도 가해자 아니냐며 나의 입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는 듯했다.
세상에 나쁜 직원은 없다. 조직을 구성한 나쁜 상사만 있을 뿐이다. 상사를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누구와 일하게 될지도 선택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상사든 실무자든 그저 조직의 목표와 성과를 위해 함께 일을 하는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인데, 그깟 다정하게 대해달라고 징징대고 업무를 잘 몰라서 같이 일하기 어려웠다고 가해자라고 하기엔 애초에 그녀가 이실에 배치된 인사부터가 잘못된 결정이었다.
어쨌든 K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종합하자면 나는 지금 가해자의 사과까지 거절하고 내부 고발을 직진하려는 MZ세대쯤으로 된 거 같다. 억울했다.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K는 나의 억울함을 최대한 풀어주겠다고 한다. 사회생활 N년차가 되니 회사에서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려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억울함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할 땐가.
K는 인사위원회로 가는 길인 이 케이스는 종결하는데 동의하냐고 물었고,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곤 결국 돌아 돌아 노무사와 같은 질문이 나왔다. 그래서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내가 원하는 건 지금 하는 일을 Y와 분리되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온 상황에서 T 밑에서 전처럼 일하는 게 가능할까 싶다. 가능하다면 다른 계열사로 다시 전배를 갈 생각도 있다.
K는 알겠다고 했고, 일단 T와 면담을 하고 마음 추스르고 다시 한번 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롸와 스위스 여행을 2주 다녀왔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가 되니 T를 다시 만날 생각에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복귀 첫날 T를 만났다. T는 비겁했다. T를 만나기 전에 중간 리더 H가 나를 보자고 한다. 그동안 인사를 통해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냐고 다시 묻는다.
어떻게 하고 싶냐… 결국 모두가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거 같았다. 애초에 인사에 찾아갈 때 ‘나는 이제 어쩌면 좋나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갔던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스스로 판단했어야 하고, 중요한 건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였다. 나에게 이런 고통을 준 가해자를 단죄할지, 더럽고 치사하니 모든 걸 피해서 휴직을 할지, 계열사로 전배를 갈지, 아니면 퇴사를 할지.
나는 K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 H는 나의 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알고 있었지만 나의 감정 따윈 크게 관심이 없었고, 계열사 전배 얘기만 쫑긋하고 듣는 듯했다.
H는 회사 내 유명한 영혼 less yes맨으로 차기 K자리를 꿈꾸는 선배다. 자기 평판 관리에 빈틈이 없고, K의 지시라면 그게 뭐든 반드시 복종한다. 이번 미션은 미팅 전에 나를 잘 달래서 보내버리기까지 정리하는 것이었나 보다.
H와의 미팅이 끝나고 나서야 늦은 오후에 T와의 미팅이 잡혔다. T는 사과를 했다. 대기업도 처음인데 리더도 처음이라 서툴렀고, 말이 지나쳤고, 너무 몰아붙인 걸 후회했다고 했다. 본인도 딸 키우는 사람인데 자기를 돌아보며 반성했다고 한다. 계열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고 들었는데 나도 말리진 않겠다. 나도 일 잘했던 롸이프님 좋게 기억할 테니 롸이프님도 좋은 기억 가지고 다른 계열사 잘 가시라…
?
나의 지난 12년 더하기 최근 한 달간 최악의 시간들이 지금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사과로 시작해서 굿바이 미팅으로 약 30분과 맞바꾼 순간이었다. 근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좋은 기억만 가져가라고 마무리하는 게 지금 맞는 말인가?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전도연에게 하느님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평화롭게 말하는 순간이 떠올랐다.
H는 역시 이번에도 맡은 일을 해냈다. T와의 허탈한 면담이 끝나자 H가 다시 다가왔다. 앞으로 사무실에 출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전배 과정 동안 재택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권유 아닌 권유를 한다. 나는 지난 스위스 휴가와 동시에 모든 팀업무가 제외된 상태였다.
그렇게 재택을 시작했고 또 한 달이 흐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