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병가 신청을 위해서는 규정상 2차 의원(종합병원) 진단서가 필요하고, 심사 후 승인 여부를 알려 주겠다. 여태 롸이프님의 니즈를 반영해 재택을 하도록 회사가 배려했으나, 그 기간이 너무 길어졌다. 병가 심사 기간까지 사무실로 다시 출근을 하시오. 현재 우리 회사는 재택을 종료하였음 “
회사는 끝까지 나를 기만하는 듯했다.
K는 건조한 메일을 보내고 나서 이내 전화를 해 친절히 부연설명을 했다. 많은 회사가 병가 절차에 2차 진단서를 요구하고 있고, 상세한 심사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울증으로 병가를 쓰는 사례가 많지 않다고도 했다. (나중에 정신과 선생님은 우울증이 회사원 병가 사유 중 상위권에 들 것이라고 했다)
이해 못 할 설명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종합병원에 가서 내가 우울증 환자라고 다시 한번 증명해오라는 말로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사무실로 출근하라는 말은 또 뭔가. 그동안 나의 니즈로 회사가 나를 배려해주고 있었다고? 재택은 H가 K 눈치를 봐가며 실 분위기를 고려해 나에게 제안한 결정이었다.
회사는 거점오피스나, 시차출근제 등 자유로운 조직 문화를 그렇게 자랑하더니 슬그머니 재택은 종료되었다고 알려온다. 말로는 인재를 위한 훌륭한 인사 제도를 시행한다고 하지만 이는 기업의 이미지 홍보를 위한 수단이 주목적이다. 임직원에 대한 사규나 지원 제도에 대한 사항은 인트라넷을 뒤지고 뒤져야 겨우 찾을 수 있다.
반면 회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보보안 서약이나 온라인 교육은 수료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완료할 때까지 수시로 알림을 보내온다. 그동안 회사의 조직문화를 열과 성을 다해 홍보해 온 내 자신이 우스웠다. 회사가 원래 그런 것이겠지만 나는 우리 회사를, 나의 일을 월급 이상으로 애정했기 때문에 그만큼 배신감이 더 컸다. 누굴 탓하랴.
근데 여태 재택을 하다가 이제 병가 승인만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출근을 하라고? 무단결근을 더 이상 봐줄 수 없으니 즉시 사무실에 복귀하라는 메일을 남김으로써 인사담당자 K는 소임을 다한 듯했다. 회사에 더 이상 책 잡힐 일을 해서는 안된다. 나는 K에게 바로 답장을 썼다.
안녕하세요, K님
2차 의료기관 진단서는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 이번 주 중 제출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재택을 하고 있는 이유는 제 개인 니즈로 회사의 배려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지난 5월 휴가 복귀 후 사무실 첫 출근일에 H와 면담에서 재택을 권유받았고, 저는 지난 휴가를 기점으로 모든 업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맡은 업무가 없어진 상황에서, 지난 이슈 관련해 실 구성원 개인 면담이 일부 진행되었고, 인사위원회까지 진행되려고 했던 분위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제가 사무실 출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되어 어쩔 수 없이 출근을 못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회사의 직장 내 괴롭힘과 그 이후 겪은 일련의 과정들로 인해 일상생활 및 직업활동에 어려움이 있는 상태라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상황입니다.
2차 진단서로 병가 승인이 나지 않더라도 당분간은 단 몇 달이라도 회사와 분리되어 정상 회복을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계열사 전배를 알아봐 주신다고 했을때 확정되기 앞서 개인적으로 휴식 기간이 필요하다고도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언제 구성원들에게 안내되었는지 모르겠으나 회사가 재택근무를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고, 저도 사규를 벗어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앞선 미팅에서도 이런 상황이(별다른 일 없이 쉬는 상황) 불편하여 K 님에게 무급, 유급 휴가 등에 대해서 여쭤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사무실 복귀는 무리해 보이는데, (H 님도 같은 생각입니다.) 병가가 확정될 때까지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알아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K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회사가 병가를 승인해주지 않을 듯한 뉘앙스를 느끼면서 다시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불안감이 들었다. (내가 다니던 1차 병원은 하필 이때 여름휴가 기간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자니 다시 외부 노무사를 만나야하나, 고용노동부를 찾아가야하나… 별의별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곧바로 근방의 종합병원에 전화를 돌려 정신과를 찾기 시작했다. 웬만한 병원들은 아예 초진을 받지 않거나, 가능해도 두 달 이상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검색에 검색을 하다 최근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C병원, '돈 안 된다'는 정신과 진료 확대‘
기사 검색을 업으로 해온 습관이 이렇게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C 병원은 정말로 진료를 확대했나 보다. 그렇게 당일 진료를 보게 됐고, 2차 병원 진단서를 손에 쥐었다. 이쯤 되니 두 시간 대기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단서 제출 후 이틀 만에 승인이 났고, 나는 25년 1월까지 6개월 간의 병가를 내게 됐다. 기본급의 70% 월급이 나온다니 생계 걱정도 덜었다. 당장 출근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겨도 보장하지 않을 듯했던 K는 사흘뒤 병가 승인이 났다는 짧은 메일과 함께 그제야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고 했다.
그날로 모든 단체 카톡방을 나갔다. 어떤 방은 보란 듯이, 또 어떤 방은 아무도 모르게. 그동안 수고한 나 자신에게 핸드폰 집중모드를 선물하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