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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Apr 21. 2022

불안해도 묵묵히 정성을 담아

사과구이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 여름내 부지런을 떨던 낮이 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시작한다. 열두 달의 절반을 훌쩍 넘겨 태양 이 추분점을 지나면 어쩐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한 해를 보내기 전에 뭐 하나라도 이뤄야 할 텐데…….


하늘은 얄미울 정도로 청명하다. 탁 트인 풍경을 여유롭게 즐기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많다. 여느 날처럼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고, 글을 쓴다. 계절은 차례차례 바뀌는데, 나만 일 년 내내 단조로운 반복을 하고 있나 싶어 새삼 소스라친다.



제자리걸음 같은 매일, 가끔 불안감이 덮쳐온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나만 혼자 동떨어져 있는 건 아닌가. 요리를 해서 SNS에 올리고 글도 써보고는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니 가끔은 왈칵 겁이 난다. 오늘은 어째 이런 잡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 싶어 마당으로 나와 데크에 걸터앉았다. 주렁주렁 모과가 열린 나무를 보며, ‘넌 그래도 열매라도 맺었구나. 부럽다’ 하고 혼잣말을 한다.


나무야말로 햇빛을 받아들이고 물을 마시는 똑같은 일상을 제자리에서 몇 년이고 반복하는 존재인데, 그래도 꾸준히 가지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언제나 꽃이 필까, 왜 이리 열매가 더디게 맺히나 초조해하지도 않고 의연하게 제 나름의 계절을 살아낸다.


가을의 서쪽 숲


뒷마당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사과나무 열매가 병들어 있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시커멓게 병이 들었지? 농약을 안 쳐서 그런가? 에고, 나는 뭐 하나 제대로 건지는 게 없구나. 검은 반점이 생긴 사과가 마치 내 모습 같아 심란하다. 갓 딴 사과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기도 했다.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려 옆 동네 사과밭으로 사과를 사러 가기로 했다. 언젠가 드라이브를 하며 봐뒀던 사과밭이다. 도착한 사과밭에는 잘 익은 사과가 잔뜩 열려 있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새빨간 사과가 대비되어 그 모습이 더욱 탐스럽다.



조심스레 사과밭으로 가서 일하시는 분께 인사를 건넸다. 사과를 사러 왔다고 하니 잠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신다. 중년의 부부가 수확한 사과를 한창 포장 중이셨다.


“젊은 사람들이 여기를 어떻게 알고 사과를 사러 왔어요?”

“아! 지나가면서 봤어요. 저희 집이 옆 마을이거든요.”

“어머. 그렇구나. 반가워요!”


시골에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유독 반가워하셨다. 두 분도 인천에 사시다가 귀농한 지 오 년이 되었다고 한다. 사과를 어찌 이리 예쁘게 잘 키우셨냐고 하니, 이제껏 내내 실패하고 올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수확을 하는 거라 하셨다. 도시 생활을 접고 괜히 시골에 왔나 싶어 울기도 많이 우셨다고 한다. 결실 없는 시간을 나무처럼 꿋꿋하게 버텨내신 두 분이 참 멋졌다.


사과밭 아주머니께서 주신 사과. 복숭아도 맛보라며 함께 주셨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 아주머니께선 우리가 산 것보다 훨씬 많은 사과를 주셨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쳐도 어차피 잘아서 팔지도 못하는 거라며 기어이 트렁크에 실어주신다. 밭에서 바로 딴 사과는 이제껏 맛본 그 어떤 과일보다 맛있었다. 어찌나 단단한지 아삭아삭 소리도 함께 먹는 기분이다. 씹을 때마다 가득 터지는 상큼하고 달콤한 과즙이 마음속까지 스며든다.


아주머니께서 주신 사과를 먹으며 조금 기운을 차렸다. 그래, 뚜렷한 결실이 없어도 괜찮아. 천천히 나의 속도로 살다 보면 언 젠가 조금씩 잎도 나고 꽃봉오리도 맺히겠지. 그러다 모르는 사이 문득 결실이 맺히기도 할 거야. 비록 지금은 아무 결과물이 안 보여 불안해도, 하고 있는 일에 조금 더 정성을 보태면 언젠가 풍성한 열매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냥 씻어서 잘라먹던 사과에도 정성을 담아보기로 했다. 사과를 반으로 자르고 씨를 빼서 얇게 슬라이스한 뒤, 계피 설탕을 뿌려 구웠다. 더없이 간단한 디저트지만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조리하니 만드는 시간 자체가 힐링이다. 구운 사과를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함께 오목한 접시에 담았다. 사과의 진한 풍미가 느껴지는 차갑고도 따뜻한 디저트다.



오늘처럼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할 때,
내가 초라하고 작게만 느껴질 때,
이 사과 구이를 기억하고 싶다.


하나하나 정성 들이면 서 ‘괜찮아, 괜찮아’ 다독였던 시간을 떠올리고 싶다. 지금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묵묵히 한 걸음씩 걸어가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무처럼 하루하루 꾸준히 살아내 다 보면 언젠가 환하게 꽃 피는 날이 오리라고 믿으면서.




불안해도 묵묵히 정성을 담아, 사과 구이

사과, 버터, 설탕, 시나몬 가루 조금


- 오븐을 180도로 예열한다.

- 씻어서 슬라이스한 사과에 녹인 버터를 넣고 섞는다.

- 설탕과 시나몬 가루를 섞어서 슬라이스한 사과에 살살 뿌린다.

 너트메그 가루와 바닐라빈을 함께 넣으면 풍미가 좋아져요.

- 20~25분간 굽는다.




차례차례 바뀌는 계절, 이 멋진 지금을 봐.
훈훈하고 싱그러운 책.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고플 때마다 꺼내 읽게 될 책이다.
_김신회(에세이스트, 《가벼운 책임》 저자)

책을 읽다 보면 냉장고에 가까운 계절을 채우고 싶어진다.
나에게 수고스럽고 싶어진다.
_임진아(삽화가, 《오늘의 단어》 저자)


스쳐가는 계절을 붙잡아 아낌없이 누리는 오늘 치의 행복,

푸근하고도 화사한 '리틀 포레스트'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어쩌면 조금 지쳐 있을 당신에게 전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식탁 일기 《보통날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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