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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Apr 22. 2022

여러 향을 품은 따스한 한 잔

뱅쇼


마당에 있는 나무도 다듬을 겸, 지저분한 가지를 살짝씩 쳐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어 벽에 걸었다. 거실 트리도 꾸미고, 캐럴까지 틀었더니 제법 우리 시골집에도 연말 분위기가 가득하다. 크리스마스에 먹을 요리를 궁리하며 쿠키를 구웠다.



음료는 무엇을 준비할까 고민하다가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뱅쇼를 끓이기로 했다. 가을에 나무에서 저 혼자 떨어진 모과 몇 개를 주워서 모과청을 담가뒀는데, 그걸 넣어 만들면 맛있을 것 같았다.


읍내 마트에 가서 저렴한 레드와인 하나를 사 왔다. 냄비에 와인을 붓고 집에 있던 사과와 귤, 배를 넣었다.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모과청도 꺼냈다. 모과청 뚜껑을 여니 주방이 향으로 가득 찬다. 시나몬 스틱과 팔각, 정향도 넣었다.



벌써 연말이라니. 12월의 순우리말은 ‘매듭 달’. 마음을 가다듬는 한 해의 끄트머리 달이라는 뜻이다. 김이 폴폴 나는 뱅쇼를 살살 저으며 올해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되새겨본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잦게 만나는 감사한 한 해를 보냈다. 


다 끓여진 뱅쇼는 향신료와 과일 향이 어우러지고, 저 밑바닥에 모과의 향이 은은하게 깔린 훌륭한 맛이었다. 달콤해서 천천히 음미하며 홀짝홀짝 마시기 좋았다.



시골 밤은 고요하다. 소리로 가득한 다른 계절의 밤과 달리, 겨울에는 가끔씩 들려오는 고라니 소리가 전부다. 그런데 뱅쇼를 끓이는 동안 바람에 풍경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건너편 가로등 아래로 눈이 흩날린다. 따스한 뱅쇼가 담긴 컵을 꼭 붙잡고 마당 데크로 나갔다. 바람은 이내 잦아들고, 성난 것처럼 매섭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깃털처럼 살포시 내려앉아 서로 몸을 포갠다.



데크 의자에 앉아 뱅쇼를 홀짝였다. 얼마나 조용한지 뱅쇼를 마시는 그 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조용히 컵을 내리고 번지는 향을 음미하며 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정적 사이로 눈 알갱이가 내려앉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빗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파도에 쓸리는 모래 소리 같기도 하다. 얌전히 내리는 눈 소리가 귀를 어루만진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눈 소리처럼 작은 것에도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여러 향을 품은 뱅쇼처럼 따스한 사람이 되었으면……. 




여러 향을 품은 따스한 한 잔, 뱅쇼

와인, 과일, 시나몬 스틱, 정향, 팔각, 꿀이나 과일청


•냄비에 재료를 모두 넣고 중불에서 끓인다.

•와인이 끓기 시작하면 약불로 줄여 30분 정도 더 끓인다.




차례차례 바뀌는 계절, 이 멋진 지금을 봐.
훈훈하고 싱그러운 책.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고플 때마다 꺼내 읽게 될 책이다.
_김신회(에세이스트, 《가벼운 책임》 저자)

책을 읽다 보면 냉장고에 가까운 계절을 채우고 싶어진다.
나에게 수고스럽고 싶어진다.
_임진아(삽화가, 《오늘의 단어》 저자)


스쳐가는 계절을 붙잡아 아낌없이 누리는 오늘 치의 행복,

푸근하고도 화사한 '리틀 포레스트'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어쩌면 조금 지쳐 있을 당신에게 전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식탁 일기 《보통날의 식탁》



인스타그램 @ssol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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