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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May 04. 2019

기억

처음이자 마지막

서클 렌즈를 낀 것 같은 초롱초롱한 눈빛. 깊은 아이홀에 큰 눈과 오뚝한 코. 달걀 같은 얼굴형. 늘씬하고 길쭉한 팔다리. 비현실적인 얼굴과 몸매를 가진 낭랑 18세 소녀를 기억한다. 세계 일주 비용 1000만 원은 나와 그녀를 연결해줬다. 나는 단 기간에 돈을 모으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과외 알선 사이트에 ‘일주일에 이틀, 하루에 2시간 동안 영어를 가르치며 비용 40만원’이라는 공고를 올렸다. 한편, 그녀는 외국어 영역이 4등급에 정체 중인 게 고민이었다. 그녀는 개인 과외를 받는 특단의 조치를 하기로 결정했고, 내가 올린 과외 공고를 발견했다.      


그녀는 성실했다. 수업 내용에 이해가 가지 않으면 곧잘 질문도 했다.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간을 주면 최선을 다해 손에 샤프를 쥐고 문제와 씨름했다. 첫 수업을 마쳤다. 그녀는 학교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게 어렵다고 토로했다. 평생 공부라는 걸 해본 적 없고,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하소연했다. 


조심스레 과외 학생이 그동안 공부를 못했던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연습생 생활하느라 공부를 놓았다고 답했다. 


“연습생? 아이돌 지망생 말하는 거니?” 하고 되물었다. 

“울림에 4년 있었어요. 데뷔 조에 있었는데 데뷔가 엎어지고 YG로 옮겼어요. YG에서도 데뷔 조에 속했는데 월말 평가에서 일반 연습생으로 강등됐어요. 5년 연습해도 데뷔를 못 해서 그만뒀어요.”       



“그래도 이젠 연습생이 아니라서 다이어트 신경 안 쓰고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해요. 모든 연습생과 선생님들 앞에서 체중 잴 일이 없는 게 제일 좋아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하지만,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노래하고 춤추는 걸 눈앞에서 놓친 게 미련이 남을 거다. 그 꿈은 데뷔 조 탈락으로 접어야만 했다. 소녀의 13살에서 18살은 한순간 휴지조각이 됐다. 연예 기획사는 노래와 춤밖에 모르는 어린 그녀를 책임지지 않았다. 스타의 자질이 보이지 않으니 무가치했고 더이상 투자 가치가 없는 그녀를 방출했다. 2018년 기준, 나의 과외학생같은 이들이 우리나라에 100만이나 있다. 그 중에서 아이돌이 될 자격을 받는 건 324명이다. 0.0324%의 확률 게임. 324명 중에서도 대중의 기억 속에 남는 아이돌은 많아야 다섯 팀 내외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포털 상단에는 YG 걸그룹인 블랙핑크의 기사가 있었다.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 뮤직비디오가 3일 만에 유튜브 조회 수 1억 뷰를 돌파했다는 내용이다. 기사와 함께 첨부된 블랙핑크의 모습은 감탄을 연발하게 만드는 화려함과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백조는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지만, 물속에서는 쉴새 없이 발길질하고 있다. 가장 크고 멋진 백조가 되고픈 이들은 학교 수업도 4교시만 대충 듣고, 곧장 연습실로 달려가 노래와 춤에 매진한다. 청소년 시기에 중요한 교우 관계는 경쟁에서 사치다. 대중은 예쁘고 큰 별들만 기억한다. 미세먼지처럼 작고 보이지 않는 100만 명의 별들은 보지 못한 채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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