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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용이 Jul 27. 2015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최진석 교수의 현대 철학자 노자



 우선 대한민국 사람들이 유튜브에 들어가 EBS 인문학 특강 '현대 철학자 노자'편을 다 봤으면 좋겠다. 그만큼 좋은 강의다. 출퇴근하면서 메모하며 시청한 총 14강의 최진석 교수님의 '현대 철학자 노자'에서 배운 것들을 요약해보겠다.   


배운다는 것과 산다는 것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학學은 모방이다. 과거의 누군가가 답을 구했거나 정리해놓은 개념과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 따라 해 보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과정이다. 배우는 것의 진정한 목적은 배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표현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배우고(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위有爲적 행동) 덜어내는 과정(도道)을 통해 남이 정해놓은 과거의 것, 남들이 세워놓은 기준과 잣대에서 벗어나 스스로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고, 자신만의 표현과 창조를 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평생 배우기만 하다 죽는 삶이 무슨 의미인가? 묻는다. 일정 시점에서는 배우는 것을 덜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문적 통찰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경계에 서야한다'


 최진석 교수의 표현으로는 문학의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단청무늬 같은 회화적 '무늬'가 아니라 인간  태초부터  현재까지 그려온, 앞으로 그려나갈 흐름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알기 위해, 그리고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경계에 서서 인간으로써의 삶을 살기 위한 학문이다.



BC  5,000년부터 시작하는 커다란 강의



 인문학의 모든 개념은 그 탄생 배경과 그 시대에 쓰인 의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때문에 BC 500년 경의 노자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국 고대 사회에서 불의 발명과 기하학적 도형, 혈연과 하느님(상제) 등이 만들어지며 각각의 혁신들이 인간의 사고와 생활양식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 인간이 어떤 무늬를 그리며 노자에 이르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노자는 총 14강의 강의에서 6~7강이 돼서야 등장한다. 수 천 년의 이야기들을 거쳐 '인문'자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고, 노자를 제대로 공부할 준비를 다하게 된다.





유무상생 : 모든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가능케하는 영역의 대립 속에 존재한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라 할 수 없고, 개념을 개념이라 부르면 개념이라 할 수 없다.

*도 :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생활양식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노자는 천명天命에 의해 살아가던 당시 중국 사회의
 한계를 자연의 이치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도가도 비상도'는 도道를 도道라고 부르지 말자는 의미 또는 도道를 찾는 것을 포기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것을 개념화(정의) 내렸을 때, 그것의 의미와 잠재력이 제한됨을 경계하자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사랑은 무엇으로 정의 내려도 사랑의 모든 의미와 가치, 가능성을 담을 수 없다.


 노자는 만물은  무無(없음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체적 자신의 모습은 없지만 이 세계를 가능케하는 영역)과 유有(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대립면의 긴장으로 존재(유무상생有無相生)한다고 여겼다. 대립하며 공존하는 것을 완벽히  개념화할 수는 없다.



도道 : 
내면으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시각을 갖기 위해 덜어내는 과정



 개념으로 정의된 모든 것들을 허물어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념화되고 정의된 외적인 잠재력과 가치에 긴장감을 갖고 주목하자는 것이다. 배움이 모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표현과 창조로 이어지려면 결국 배운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시각을 갖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배운 것들은 과거의 것이고 제한된 것이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고 표현하기 위해, 개념화된 것, 정의된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이 도道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천하天下처럼 아끼는 자기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소국과민小國寡民 :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자율적 개인
 다수가 뭉친 사회가 강하다.


 반복학습을 통해 외부적 이상 사회의 모습 예禮에 도달할 것을 이야기한 공자와 달리, 노자는 사회 구성원들이 그들 자신의 내부와 우리 일상에 충실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소국과민은 나라도 작고, 백성도 작은 나라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권이 민간에게 주어지고 나라가 작은 단위로 쪼개져 있는 나라이다. 각 개인들이 자아를 펼치며 살아가는 사회이다. 노자는 개인이 일반명사로 아닌 고유명사로 존재하는 크기의 사회까지 작게 쪼개진 공동체 사회를 이야기한다. 이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현대 도시와 달리, 동네 사람들끼리 전부 알고 돕고 지내는 현대 농촌 사회와 유사하다. 또 노자는 참된 지도자를 일컫어 지도자의 신하, 백성들에게 있는지 없는지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백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지도자라고 하기도 했다.



무위와 무불위無爲 無不爲 : 보이는 대로 보기 때문에 되지 않는 일이 없는 상태



 노자는 사람들이 도道를 행하여 무위無爲라는 지점에 이르기를 바랐다. 무위無爲는 
배우고 덜어내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기준과  개념들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온전한 내면으로 '보이는 대로 보는'것이다. 노자는 무위에 이르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보았다.




 



 노자를 만나며 노자는 현대 철학자이자 용기의 철학자라고 느껴졌다.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소국과민은 물론 창의성과 다양성, 자율성을 필요로 하며 추구하는 현대 사회를 2000년 전에 준비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한국사회의 만연한 다양성 존중 부족의 문제, 높은 자살률과 낮은 행복지수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점에서 용기의 철학자라고 느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대중적 아들러 철학책 '미움받을 용기'와 들뢰즈의 철학과도 비슷한 점이 많아 신기했다.

 남과 다른 시각을 갖고, 창조를 하고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외부적 압박을 이겨내고 보이는, 보이지 않는 폭력들을 거부해야 하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최진석 교수님의 노자 철학 강의를 보고 더 자신을 확신을 갖고 사랑하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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