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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수업

나만의 요구르트

by 소소인

요구르트


어느 날, 유제품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새로 개발한 요구르트가 있어. 집으로 보내줄게, 이거 개발하느라 그동안 힘들었다.’


친구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직업을 가졌다. 그리고 그 직업에 머무른 지 10년을 훌쩍 넘겼다. 친구는 그 세월을 부지런히 쌓아 올려 자신만의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며칠 후, 친구가 만든 요구르트가 마트 진열장의 한 자리에 자리잡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친구는 요구르트를 만들며 ‘사람들이 원하는 맛과 영양을 함께 갖추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교육 프로그램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의 요구와 수준을 반영하는 동시에 꼭 필요한 영양도 갖추어야 한다고. 그날, 나는 나만의 세월이 담긴 요구르트를 내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담은 프로그램 – 시대와 미래와 나의 지난 시간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까. 여러 기준과 고려 사항들이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미래 사회에서 살아갈 학생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련된 내용을 담는 것이었다.


마침, 디지털 전환을 필두로 한 4차 산업혁명이 세계를 근본부터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불평등과 기후 변화를 비롯한 지구적인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시대의 변화는 미래 세대의 삶을 뿌리부터 바꾸고 있었고, 학생들은 그들을 온몸으로 마주하게 될 터였다. 그 내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관점을 갖는 것은 지적·실용적으로 모두 중요해 보였다.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수업에서 다룰 주제들을 정했다. 시대적으로 중요하면서도 학생들이 맞을 미래의 삶에 밀접한 것이 무엇일지 집중적으로 고민했다. 그렇게 정한 주제들은 바로 이것이었다.


1.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

2. 메타버스, 현실과 가상을 섞다

3. 불평등과 양극화

4. 뉴 미디어와 미디어 리터러시

5. 기후 변화와 인류의 미래

6. 젠더(gender)갈등

7. 인간과 동물의 관계

8. 일의 미래와 새로운 사회제도의 모색 – 기본소득 논쟁

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정세의 변동


이렇게, 내용은 정해졌다. 이제 이들을 담은 교재를 만들 차례다. 내가 만들 프로그램의 실체는 바로 이 교재 속에서 구현될 것이었다.


글쓰기 – 교재로 구현한 맞춤형 수업


교재를 만들면서 중심에 두었던 가치는 ‘교사 주도성과 학생 맞춤형의 균형을 잡는 일’이었다. 수업의 모든 것을 교사가 통제하면 동기가 약화 되고, 학생에게 모두 맡기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이 둘을 조화시킬 방법을 고민한 끝에, 책의 구조를 구성했다. 그것은 ‘1단계:지식 – 2단계: 질문 고르기 – 3단계: 생각 나누기 – 4단계: 글쓰기와 첨삭’이었다.


‘1단계: 지식’은 교사가 주도하는 시간이었다. 각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지식을 추출해서 학생들을 위한 텍스트로 서술했다. 이 과정은 교사가 전문적인 서적을 연구해서 직접 수행하는 게 시간적으로나, 오개념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 적합해 보였다.


‘2단계: 질문 고르기’는 교사 주도성과 학생 맞춤형이 어우러진 단계였다. 주제당 20개 내외의 질문을 만들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 그러니까 가장 가치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토론을 하도록 했다. 학생들의 관심과 진로가 수업의 내용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콘텐츠가 범람하는 오늘날에는 가치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판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반영되어 있었다.


‘3단계: 토론하기’는 선정한 주제로 토론을 나누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선정한 주제이기에 더 활발한 참여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4단계: 글쓰기와 첨삭’은 이 프로그램을 맞춤형 교육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단계였다. 주제에 대한 의견을 긴 호흡의 글로 작성하고, 그 내용을 교사와 공유하도록 했다. 개별 첨삭은 학생 개개인의 성장을 확인하고, 또 촉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재 쓰기는 어려웠다. 먼저,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무엇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정보인지를 선별해야 했다. 그것을 완벽하게 해 내는 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또한, 고르고 요약한 정보들을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다시 서술했다. 꼬박 1년이 걸렸다. 한계와 가능성 사이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누르며 글을 썼다.


그렇게, 세상에 없는 나만의 교재가 만들어졌다. 그 책에 나는 ‘오늘의 세상으로 토론하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드디어 완성이었다.


수업 – 세상에 내놓다


교재를 완성했으니, 이제 수업할 차례다. 그런데 난관이 있었다. 이 수업은 특정한 교과에 해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글 첨삭은 학생 수가 많으면 감당할 수 없다. 고민하던 중, ‘공동 교육과정’이 눈에 띄었다. 마침 ‘세계 문제와 미래 사회’가 공동 교육과정의 한 과목으로 개설되었다. 내 프로그램은 이 교과목의 교육과정에 적합했다. 그래서 ‘교육과정의 완전한 재구성’ 사례로서, 수업을 개설할 수 있었다.


강좌를 개설하고 수업 계획서를 올리자 6명의 학생이 신청했다. 스스로 찾아온 만큼, 학생들은 성실하게 참여했다. 텍스트를 사전에 읽어 왔고 토론과 글쓰기에도 진지하게 임했다. 질문을 고를 때에는 자신의 진로와 관심사를 반영했고, 때로는 질문의 가치를 가늠하기도 했다. ‘질문 고르기’를 만든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지식과 첨삭도 큰 힘을 발휘했다. 학생들은 지금의 시대가 맞고 있는 변화의 내용에,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의 미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수업을 마치고 받았던 설문에서 ‘새로운 사실을 아는 게 재미있었습니다.’라는 말을 서로 약속한 한 듯 적어주었다. 앎이 즐거움이 되었다는, 지적 만족감이 동기가 되는 상황을 오랜만에 마주할 수 있었다.


첨삭은 글쓰기의 원동력이었다. 자신의 글이 진지하게 읽힌다는 믿음, 글에 대한 교사의 의견을 개별적으로 받아본다는 사실이 힘을 가졌다. 처음에는 한 문단 정도의 글을 간신히 써내던 학생들이 점점 긴 호흡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학생은 한번 썼던 글을 첨삭 내용을 반영해서 자발적으로 다시 쓰기도 했다. 글쓰기는 느리지만 확실히 성장했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스스로 작성한 9편의 글을 간직하게 되었다. 글들은 사고의 폭을 확대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크게 2가지 형태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의견에 대해 예상되는 반론을 고려하는 것이었다. 토론하는 과정에서 ‘예측되는 반론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그것을 글에 반영하도록 한 결과였다.


두 번째는 ‘주제 간의 연결’이었다. 어떤 학생은 이렇게 썼다. ‘4차 산업혁명은 메타버스 기술의 발전을 촉진했고, 또 불평등의 요인이며 기후 변화에 영향을 준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학생들은 배경지식을 쌓고, 그것들을 연결하여 적용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을 여러 방식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는 학생 개개인의 관심과 사고가 스며들어 있었다.


하나의 프로그램, 여러 개의 세계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세계관 그리기’였다. 앞서 다룬 주제 간의 관계를 구조도로 그려 표현하고 왜 그렇게 보았는지 설명하도록 했다. 세상이 서로 긴밀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한 평가 도구였다.


학생들은 모두 다른 모양의 구조도를 그렸다. 교사를 꿈꾸었던 한 학생은 세상의 중심에 교육을 두고, 그것을 다른 모든 문제와 연관 지었다. 그는 말했다. ‘수업에서 다룬 모든 주제가 교육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교육은 그들 모두를 바꿀 수 있어요.’ 같은 수업을 거쳤지만,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 그림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맞춤형 교육’으로 마무리되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증표였다.


그 이후, 나는 이 프로그램을 상황에 맞추어 여러 형태로 바꾸어 적용하고 있다. 방과후 수업, 방학 중 독서 프로그램에서 일부 주제를 가지고 토론과 글쓰기를 한다. 상황과 학생들에 따라 조금씩 얼굴을 바꾸며 현장에서 숨 쉬고 있다.


이 프로그램과 학생들이 그려 낸 세계관 구조도는 나의 지난 교직 생활을 녹여 만든 새로운 요구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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