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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문제를 내면서 잃어버린것

정확하게 줄세우는 것 말고는

by 소소인

요 며칠간 학교에서 기말고사(요즘에는 2회고사라고 부른다)를 치르고 있다.


객관식. 단답형. 서술형. 학교 시험문제는 이 세가지 중 하나다. 다섯개의 선지 중 정답을 찾게 하거나, 단어를 쓰게 하더나, 문장을 쓰게 하는 것을 '시험문제 출제'라고 부른다.


문제를 내고 또 검토하면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문항의 오류'를 찾아 없애는 일이었다. 문제는 절대 틀려선 안된다. 두번째로 중요한 일은 '1등급을 선별할 수 있는 난이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너무 쉬워서 100점이 많이 나와선 안된다. 그러면 1등급이 없을수도 있다.(만약 4등까지 1등급인데 100점이 5명이 나오게 되면, 모두 2등급이 된다.) 요컨대, 문항 출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학생들을 오류없이 줄세우는 도구를 만드는 일'이다.


학교를 다니며 늘상 시험을 치러 온 사람이라면, 이 두가지에 집중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험 문제는 오류가 없어야 하고, 적절한 난이도를 갖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고민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바로 '기본'이다.


나는 사범대를 다니면서, 평가에는 '타당도'가 중요하다고 배웠다. 말 그대로 타당한 평가를 하라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학생들이 배운 것 중에서 평가할 가치가 있는 것을 적절히 평가하라는 의미다. 만약 임진왜란을 배웠다면, 거기에서 꼭 배워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일들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당시의 국제정세나 조선 국내의 정치적인 상황 같은 것이 곁들여질 것이다. 평가는 이런 중요한 것들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타당도'를 확보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1등급을 내기 위한 난이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결코 이순신을 물어서는 안 된다. 모든 학생들이 정답을 맞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거시적으로 물어서도 안 된다. 이것 역시 너무 쉽다. 여기서 물어야 하는 것은 임진왜란때 일어난 여러 사건들의 순서를 세세하게 묻거나, 아주 디테일한 사실들 중 어떤 것을 틀리게 적어놓은 후 구분하게 하는 일이다. 이 문제들은 타당하지 않다. 하지만 1등급을 위해 내야 한다.


무오류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어떨까. 문제에 오류가 없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의 평가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는 성적을 결정하고, 성적이 대학을 정하고, 또 대학이 학생들의 삶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 그래서 문항에는 오류가 없어야 한다.


오류가 없는 문제는 어떤 것일까? 문제가 원하는 것이 명확해야 하고, 또 그 해답도 분명해야 한다. 답인 것과 답이 아닌 것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 그게 '무오류의 문제'다. 이 문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문제에 적용할,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기준'이 바로 그것이다. 그 기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바로 '교과서'.


시험문제는 '명확한 사실'로만 구성되어야 하고,그 사실들은 교과서에서 인용되어야 한다. 교과서야말로 무오류의 절대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부터 교과서는 단순한 학업자료가 아니라 성경책으로 둔갑한다. 교과서는 모든 공부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잡고, 그 이외의 관심과 흥미는 쓸데없는 것이 된다.


나는 대학때 교과서에 대해 이렇게 배웠다. '교과서는 학교에서 취급하는 여러 교재 중 하나다'. '교육 내용은 교사가 재구성해도 된다'. 나의 대학시절 공부는 현실을 담아내지 못했다. 교과서는 대체 불가하고, 내용을 재구성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만약 학교의 시험이 '정밀한 줄세우기의 도구'가 아니라면, 문항의 오류가 이렇게 민감한 일이 아닐수도 있다. 학생과 문제의 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수도 있고, 또 교사가 실수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는 일도 오히려 쉬워질 수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문항에 오류를 내면 그것을 시정하는 데 복잡한 절차와 추가적인 민원이 제기된다. 모두 '성적이 지나치게 중요해서'생기는 일들이다.


오류가 없는 줄세우기 시험 안에서, 교과의 가치는 사실상 외면받고 있다. 임진왜란 시간에 이순신만 배워서는 곤란하다. 학교는 이런 비상식이 상식이 된 지 너무 오래다. 너무 오래되어서, 이것을 비상식이라 여기는 인식마저 희미하다.


기말고사는 오늘날 교사와 학생을 둘러싼 서슬퍼런 현실이다. 그것은 단 하나의 기준, '정밀한 줄세우기'에 입각해 있다. 그 안에서, 교과가 가지는 핵심적인 가치과 내용은 실종된 지 오래다.


이대로 괜찮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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