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연애를 하던 시절, 우리는 늘 대한민국을 벗어날 열망을 꿈꿨다. 그리고 남편과 결혼을 하자마자 우리는 함께 캐나다로 떠나기로 했다.
편견일 수 있겠지만 남편과 나는 각자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 말은 즉슨, 첫째에 비해 덜 간섭받고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했으며,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아닌가 시대착오적 발상인 걸까) 어쨌든 나의 경우, 둘째와 둘째의 만남은 결혼이라는 매체를 통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하게 되었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우리는 늘 새로운 도전을 갈망했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기 전엔 꼭 둘만의 남다른 도전을 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어르신들이 말하는 대학 가서 취업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해서 애를 낳는 그런 코스가 아니라, 결혼해도 우리가 누리고 꿈꾸고 싶은 순간을 경험하고 느끼고 가족을 이룰 준비가 되었을 때 아이를 낳고 정착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시작되고 있었고, 해외에 거주해도 별 지장 없는 자유로운 카피라이터였던 나에 비해 수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편은 해외에서 무언가를 하기엔 이제껏 쌓아온 노력과 공(?)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따라서 우리의 모험은 나의 도전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캐나다 캘거리에 있는 모 대학원을 지원하게 되었고, 몇 번의 영어 시험과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준비해 입학 허가를 받게 되었다. 생각보다 순탄한 과정이었다. 국어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열렬한 서포트를 받아왔다. 그 덕에 영어나 일어를 자유롭게 하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솔직히 지금 일본어... 는 자신이 없네?) 그렇다 보니 대학원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데 있어 큰 스트레스 없이 그야말로 준비 과정이 탄탄대로였다.
그즈음 우리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결혼식을 올리기 불과 5개월 전 코로나 바이러스가 뉴스에 하나, 둘 등장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잠시 왔다 가는 소소한 전염병 수준으로 인식했다. 짧아야 일주일, 길면 한 달? 그러다 말겠지 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사태가 거짓말처럼 심각해졌다. 일주일에 스카이프로 3번은 만나는 필리핀에 거주 중인 나의 영어 선생님은 슬슬 진심을 담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비쳤고 남편과 나는 잘 보지도 않는 뉴스를 매일 아침 일어남과 동시에 모니터 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결국 우리는 국내에 번지는 좋지 않은 상황과 한국발 비행기는 모두 봉쇄하기로 결정한 유럽의 결정으로 노르웨이와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던 모든 신혼여행 일정을 전부 취소해야 했다. 더불어 강원도 강릉에서 진행되는 우리의 결혼식에도 참석 인원에 제한을 두어야 했다. 남편과 나는 결혼식 전, 지인을 초대하는 식사자리에도 인원 제한이 생겨버린 탓에 제대로 된 대접도, 제대로 된 결혼 소식도 알리지 못했다. 말 그래도 의도치 않은(?) 스몰 웨딩을 하게 된 거다.
그리고 찾아온 중대한 고민
'지금 캐나다로 가는 것이 맞을까.'
캐나다 대학원에서도 여러 국제적인 상황을 고려해 최대한 모든 클래스를 화상 수업으로 전환한다는 내용과 함께 해외 거주 학생들에 한해 꼭 캐나다에 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그 나라에서 화상으로 만나자는 (비싼 돈 주고 수업을 들으려 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의 공지 메일이 왔다. 때마침 당연하게도(?) 캐나다행 항공편도 급격히 수가 줄어들었다. 절망적이었다. ‘어쩐지 순탄하더라.. 내 인생이 언제 이렇게 순탄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시련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전 지구적인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해탈의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은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 나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대가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뭘 더 얼마나 슬퍼할 수 있겠나 싶어 오히려 남편과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을 빠르게 세우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토록 기대하고 준비하던 결혼과 유학이었지만, 결혼을 제외한 모든 계획을 취소하는 데 합을 맞췄다. 나는 합격한 대학에 등록금 환불을 요청했고, 학교에서 안내해 준 입학 취소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준비했다. 호기롭게 계획했던 우리의 캐나다행은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우 가볍게 무산이 되었다..^^
그리고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한국에서 결혼 생활을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코로나 덕분에(?) 우리는 계획에도 없던 서울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캐나다로 떠나지 못한다는 마음을 빨리 인정하고 눈앞에 놓인 현실에 금방 적응해서였을까.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서 남편과의 신혼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달콤하고 재미있었다. 친정이고 시댁이고 주말이 되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고 우리에게 생긴 한국에서의 시간을 최대한 즐겁고 보람된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노력했다. 그리고 조금씩 바이러스 소식이 줄어들면서 비행 편이 늘어나고 있었고 우리는 이때다 싶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시 떠날 마음과 물리적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물 건너 간 나의 플랜을 뒤로하고, 남편은 수의학 전공을 살려 미국과 캐나다, 영국에 있는 대학교에 대학원 지원을 시작했다. 내가 아는 남편은 어떤 일을 한번 결정하면 무슨 일이 생겨도 꼭 해내고야 마는 스타일이기에 대학원을 진학하겠다는 그의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왠지 모를 긴장이 섞인 묘한 감정들로 하루하루를 지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느낀 긴장감은 남편 역시 열심히 준비했다가 나처럼 컨트롤할 수 없는 변수로 인해 무산될까 하는 우려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양가 식구들의 반응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우선 막내딸을 시집보낸 우리 집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왜 사서 고생이냐며 걱정이 많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굳이 모험을 선택하는 딸의 결정이 못내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 보였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진 시댁 부모님들은 우리의 결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지해주셨고 이왕 나간 김에 그곳에 뿌리를 내리라는 조금 서운한(?) 덕담도 서슴없이 해주셨다.
남편은 미국과 캐나다, 영국의 여러 대학 교수들과 이메일로 연락하며 주말, 낮밤 가릴 것 없이 화상으로 면접을 봤다. 그리고 여러 번의 도전 끝에 영국 글라스고 대학교 대학원으로부터 합격 메일을 받았다. 남편 노트북에서 간 밤에 울린 알림음에 우리는 같이 울고 또 웃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누가 봐도 ‘걱정’이라 쓰여 있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도 내가 이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남편과 시작한 인생 2막을 성공이든 실패이든 내 인생의 오롯한 탐험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만날 미래 자녀에게도 후회 없는 무용담을 들려줄 수 있으면 더더욱 좋고. 그 이야기가 비록 남루하고 쓸모없다 할지라도 돌이켜봤을 때 스스로에게만큼은 매우 후회 없는 선택이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