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우리는 캐나다가 아닌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으로 돌아가려했던 건 난데 그 역시도 내가 아닌 남편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역시 인생이 한치앞을 알 수가 없는거다. 그나저나 남들 4년 공부할때 6년을 대학교에서 공부 했던 남편은 영국에서 또 다시 책가방을 매게 되었다. 남편은 이를 두고 ‘유학 당했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래나 저래나 대학원에 선뜻 지원하고 선발되기 위해 노력해온 순간을 본 나로선, 남편 역시 커리어를 보다 더 발전시키고 싶었던 열망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하니 문제가 생겼다. 평생 할 줄 아는거라곤 한국말로 카피 쓰고 한국말로 광고 콘텐츠 짜는 게 전부인 내가 영국에서 쥐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이었다. ‘스타벅스에서 알바를 할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적도 있지만 남편은 그러지 말고 이 시간을 잘 활용해 최대한 나만의 경험을 해보라고 권했다. 뭐라도 하며 뒷바라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아무도 주지 않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향한 남편의 단비같은 조언이, 돌이켜보면 영혼을 갈아 시작한 내 브랜드 레브드수니의 꾸준한 동력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새삼 뭉클하다. 어찌됐든 팔자에 없는 줄 알았던 ‘남편 내조’를 영국에서 하기로 결론 짓고 이제껏 경주마처럼 달려온 나에게 직접 포상하는 1년간의 Gap year(갭이어)라고 생각하며 바람이 흘러가는대로 잘 살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제 아무리 요가, 필라테스를 통해 정적인 마음가짐과 코어 강화를 위한 신체 훈련을 해왔다 지만 원체 뭘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성격의 사람이다. 태어나보니 엄청나게 부지런한 엄마와 엄청나게 생활력이 강한 아빠가 내 부모님이었다. 그렇다보니 나는 어렸을 때도 가만히 있는 걸 잘 하지 못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학점 관리만 잘 해서 졸업해도 되는 것을 3-4개의 대외활동을 병행하며 취업을 위한 스펙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고 또 집착했다. 졸업 막학기가 되어서는 회사 인턴으로 취직해 대학 한학기와 취업 활동을 맞바꾸는 실무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인턴으로 들어간 회사에 대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입사를 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더 가관이었다. 늦으면 새벽 퇴근도 빈번하게 했던 광고업계에 몸담고 있어서 였을까. 법적 공휴일에도 자발적 전투 태세로, 남편과 데이트를 할때도 업무 관련 메세지를 상시 대기하며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지니고 있었다. 지독한 멍청이었다.
나는 타고난 재질이 일이 없으면 불안하고, 그렇다고 일이 있다고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다. (뭐 어쩌라는건지)
그래서인지 남들에 비해 이직도 빨랐고 이직을 결정하는 순간도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주변 선배들은 '그것도 능력이다'라고 말했지만 글쎄..
비싼 옷 하나를 진득히 입지 못하고 저렴이 옷 여러 장을 쉴새 없이 갈아치우고 있는 삶이랄까.
그렇게 살아온 내가 영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직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처음 영국에 도착해서는 감사하게도(?) 좀 쑤실 일이 없었다. 오히려 해야 할일이 너무 많아 당황스러웠다. 당장 1년간 우리 부부가 지낼 집도 구해야 했고, 외국인 거주에 필요한 BRP카드 즉 신분증도 만들어야 했고, 생활에 꼭 필요한 체크카드도 만들어야 했고, 의료 보험도 들어야 했고, 보건소도 등록해야 하고.. 등등 이래저래 해야 할 게 정말!!! 많았다.
아는 게 전혀 없는 낯선 나라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온전히 우리 부부만의 정보력으로 하나 하나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터무니없이 좌절스러웠던 적도 있다. 특히 남편은 개강을 한달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또 당장에 필요한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제대로 갖춰진 건 없었고, 우리는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조금씩 불안해져갔으며 앞으로의 미래가 조금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끈끈한 가족들의 응원과 힘을 받아 좌절하면 다시 일어나고, 오늘은 실패해도 내일은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필요한 것들을 해결했고 그렇게 약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우리는 마련해야 할 것들을 다 갖춘 채 남편은 학교로, 나는 집에 남아 영국에서 보통의 일상을 시작했다.
남편이 학교에 가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집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일이었다. 이게 단순한 일인 것같지만, 오늘은 무얼 먹고 그 무얼 먹기 위해 난 무엇을 어떻게 지출해야 하는 가에 대한 결정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일이었다. 느끼하고 특색없는 영국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우리는 주로 한식을 해먹었고, 그 덕에 나는 날로 요리솜씨가 좋아졌다.(백종원 유튜브 최고!) 나는 영국에 그렇게 적응했고 무난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조금씩 무료해져갔다.
그리고 그런 나를 빠르게 관찰한 남편은 집 근처 필라테스나 요가 아카데미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제대로 된 취미가 없는 내가 유일하게 성실히 했던 취미는 바로 필라테스였는데, 남편은 그런 나를 위해 영국에서 할 수 있는 필라테스 스튜디오를 알아보길 원했던 거다. 그렇게 나는 남편의 학교 스포츠센터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들을 수 있는 필라테스 클래스를 찾았다. 일주일에 많으면 5번, 적으면 2번 정도 듣는 필라테스는 다시 한번 나의 무료한 일상의 활력이 되어주었다. 기구 필라테스가 주된 운동이었던 한국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매트 베이스로 진행되는 이곳의 방식에도 잘 적응했고 필라테스로 인해 나만의 일상 루틴이 조금씩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평일 하루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커피를 내린다. 커피가 내려지는 고소한 향을 맡으며 남편과 간단히 먹을 아침을 준비하고, 남편과 집 근처 산책을 1시간 정도 한다. 그리고 남편이 학교에 가면 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오후가 되면 옷을 갈아입고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일기를 쓰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미리 예약해 둔 필라테스 클래스에 참석해 1시간 열심히 운동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서 저녁 거리를 보고 집에 와서 남편과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나 자신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최대한 하루를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보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어느 날 인생을 바꿔 놓은 친구, 캐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