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미술관 2025 기획전《유현미: 하이브리드 리얼리티》후기
전시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느낄 때,
고조되는 마음!
1984 하면 바로 떠오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작가님을 뵙기 전이었으나, 이 설치물을 보고 작가님이 영감 받으신 것이 조지 오웰의 소설이 맞는지 궁금했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시각적 감각이 두드러지는 전시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느끼게 될 때 이미 고조 상태다.
이 작품부터가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주는데,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까지도 마치 전시의 일부처럼 보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유현미 작가님과 함께 하는 전시 투어는 3층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마저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3층 코스모스(COSMOS)
유현미 작가가 2013년 처음으로 선보인 <코스모스> 연작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오브제를 공간에 배치한 후, 그 위에 색과 그림자를 다시 그려 만들어낸 작품이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이지만, 마치 우주 공간을 떠도는 행성처럼 보이는 것이 눈에 띈다. 작가님께서 오늘 관객과의 만남 또한 이 작품처럼 "각자의 우주가 만나는 개념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보다 더 따스한 환영 인사가 또 있을까?
페인팅이야?
아니면,
사진이야?
논쟁, 오히려 좋아!
작가의 작품을 보며 관객들은 채색된 그림인지 그도 아니면 사진인지 논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석고나 목재로 제작한 오브제와 공간을 무대로, 빛과 그림자를 물감으로 덧입힌 후 정밀한 조명 아래에서 사진을 촬영한다. 회화와 설치, 사진을 결합하는 방식이야말로 작가의 대표적인 작업 방식이라고 한다.
일부 연작에서는 출력된 사진 위에 다시 유화를 채색하는 방식으로 예술 매체와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 든다.
내가 작가와의 만남을 좋아하는 이유는 작가의 예술관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서다. 유 작가의 작업 방식만 보아도 녹록지 않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다소 예스러운 아날로그 형태의 작업 방식을 고수한다.
작업에 일체의 포토샵을 사용하지 않고, 색깔의 범위 또한 0에서 100까지 시도해 볼 정도로 끝없이 테스트를 이어간다고 한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something black, something white!"를 외치며 어시스턴트들과 작업을 이어간다고.
왜 이렇게 수고스러운 작업을 이어가냐는 질문에 작가는 "관객들이 굉장히 똑똑해요. 결국은 관객이 알 수 있다고 믿고 해요."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작가님의 이 말씀을 오는 내내 곱씹었다.
나는 블로그에 글 하나를 쓰더라도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편인데, 가끔은 그 마음을 거두고 빠르게 많은 양의 글을 써서 조회수를 올려볼까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자는 생각을 했다. 글은 남는 것이고, 먼 훗날이라도 이 글을 진심으로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마치 시간의 멈춤을 포착한듯한 깨진 거울이 담긴 작품들. 그리고 깨져버린 모래시계. 초현실적인 작품의 분위기 덕분에 지구에서 시간이 멈춰진 동안에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2층 굿 럭(Good Luck) / 십장생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곳은 바로 2층이었다. 한국 작가로서 한국 미술을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는데 그 노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람들은 십장생을 바라보며 장수를 기원했고, 때문에 시문, 그림, 조각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오래 사는 것은 인류의 가장 중차대한 욕구였던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나의 심금을 울렸던 작품은 바로 이 작품. 지극히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내 삶을 은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프리랜서, 그리고 1인 회사 대표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나의 둥지는 늘 위 작품과 같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위태롭게 흔들리고 흔들렸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절실함이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대단한 인맥이나 거대한 자본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건 믿을 구석이 나밖에 없었고, 나 혼자 서야 했기 때문에. 그러니 이 작품이 나의 최애 작품이 되었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 흔들리는 이들이여,
그 위태로움 속에도 분명
스스로를 균형 잡게 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나의 중심을 잡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 위태로움일 것이라고.
1층 그림이 된 남자
<그림이 된 남자>(2009)는 유현미 작가가 직접 저술한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상 작업으로, 동명의 사진 작업의 제작 과정을 서사화하며 사진, 영상, 회화, 설치를 아우르는 실험적 시도들을 보여준다.
영상과 작품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작가님은 시나리오도 쓰시다니, 역시 문학적 상상력을 기대한 나의 추리가 맞아떨어졌다. 작가님 같은 분이 진정한 종합예술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재밌었던 건 여기 출연한 분들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된 공간은 작가님의 집이라고 한다.
지하 1층 수의 육체/스틸 라이프
1층 로비에서 보았던 숫자들의 실마리가 여기서 풀렸다. 1층에서 본 숫자들이 입체 구조물이었다면, 이곳의 숫자들은 2차원의 사진이다.
작가는 소설 <어린 왕자> 속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상징하는 네 번째 별의 인물을 통해 숫자의 통념을 뒤집고 자유로운 상상적인 수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작가님의 설명을 듣고 봐서 그런지 5라는 숫자에 유독 눈길이 갔다. 중앙에 있는 게 힘들지만, 너무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그 밸런스가 맞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숫자.
또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기억이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는 수학 박사가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아름답고 황홀한 수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유현미 작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스틸 라이브> 연작을 시작으로 회화, 조각, 사진의 경계를 넘나다는 실험을 지속해 왔다고 하는데 공간과 사물의 표면을 흰 젯소로 덮고, 그 위에 정물화의 색채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회화적인 장면을 구성한다고 한다. 장르적 특성을 결합하니 작품 또한 신선하게 다가온다.
관객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작업에 일체의 포토샵을 사용하지 않고, 끝없이 테스트를 이어가며 작품 세계를 확장해 온 유현미 작가. 작업을 할 때마다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안일한 생각 대신 "조금 더, 더, 더!"를 외치며 시도의 폭을 확장해 보기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