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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엘 Oct 26. 2024

직장생활 9년차, 꼭 열정적이어야 하나요?

안성재 셰프에게 위로받은 날, 열정보다는 진정성.



1. 저는 직장생활 9년차입니다. 숫자 9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불교에서 숫자 9는 깨달음과 지혜를 상징하고,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9를 완전한 수로 보았다고 해요. 한편으로 9하면 저는 아홉수가 떠올라요. 아홉수에는 불행한 일이 많이 생긴다는 미신이 있죠. 아홉수를 누구보다 찐하게 겪은 존재는 아마도 구미호가 아닐까 싶어요. 인간의 간을 100개 먹어야 사람이 되는 구미호는 매번 99개 째에서 인간에게 퇴치되곤 했으니까요. 완전하면서도 불완전한 숫자 9는 양면성을 가진 숫자인 것 같아요. 


2.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초년생 때는 9,10년차 선배들이 참 대단해보였어요. 물어보면 뭐든 대답해주고, 문제도 척척 해결해주었죠. 그들이 참 멋져보였어요. 저는 생각했죠. 나도 저만큼 연차가 쌓이면 고민도 걱정도 없고 멋지게 회사생활을 해 나가겠지?라고요. 그런데 막상 9년차가 된 지금, 그때 그 선배들... 참 고민 많았겠구나 싶더라고요. 지금 제가 딱 그렇거든요. 연차는 이만큼 쌓였는데 나 잘 하고 있나? 나 이 일을 계속 해도 되는 걸까? 나... 잘... 살고 있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3. 저는 첫 직장에서 9년째 일하고 있어요. 요즘처럼 평생직장이 없는 분위기에서 한 회사를 9년 다녔다고 하면 다들 깜짝 놀랍니다. 그랬던 제가 최근 이직을 고민했어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예전만큼 일에 열정이 느껴지지 않아서였어요. 저는 일하면서 느끼는 성취감을 좋아해요. 내가 쓴 이야기가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게 신기하고, 시청자의 반응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죠. 그런데 루틴한 생활이 반복될수록 내가 더 이상 뭘 할 수 있을지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더 이상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불타오르지 않았죠. 급기야 이 업계를 떠나야겠다는 생각 마저 들었어요. 9년간의 시간을 부정하기도 했고요.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길을 잃은 것 같았어요. 


4. 며칠 전 롱블랙에서 안성재 셰프의 인터뷰를 봤어요. 흑백요리사에서 안성재 셰프는 심사평 중 채소의 익힘 정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더라고요. 처음 그의 심사평을 들었을 때는 정말 사소한 것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가보다 했어요. 그런데 그의 인터뷰를 보고 전혀 다른 의미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열정은 없어도 돼요. 있다가도 없는 게 열정이라 생각해요. 진정성이 없고 마음만 앞설 때 쓰기 쉬운 말이 열정이죠. 경력도 기술도 중요하지 않아요.
뭐가 됐든 진정성 있게 요리에 임하는 사람이 좋은 요리사라고 생각해요."

"채소의 익힘 정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디시dish에서 가장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고기가 맛있고 소스가 맛있으면, 맛있는 요리겠죠. 하지만 그건 가장 기본이에요. 대충 해서 넣을 수 있는 채소의 간과
익힘까지 하나하나 다 맛보고 최선을 다할 때, 요리에 진정성이 있는 거죠."


5. '있다가도 없는 것이 열정'이라는 말에 저는 많이 위로 받았습니다. 더 열정적이고 싶고, 더 뛰어들고 싶은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서 스스로가 참 미웠거든요. 그런데 열정이라는 게 있다가도 없는 거라니. 지금은 그냥 잠깐 열정이 사그러든 시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안심이 되더라고요. 


6. 생각해보면 일도 연애와 똑같아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처음에는 불타오르고, 잘 보이려고 애쓰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편안해지는 시기가 오잖아요. 사랑도 처음과 같을 수 없는데, 일이라고 다를까요? 9년차, 10년차가 된 사람이 1,2년차처럼 계속 똑같이, 끊임없이 불타오르면, 결국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릴 거에요. 


7. 장인이 칼을 만드는 과정을 보신 적 있나요?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을 만들기 위해서 적당한 열처리와 담금질이 여러 번 반복되어야 한다고 해요. 열을 너무 많이 주면 칼이 휘어버리고, 열이 부족하면 단단한 칼을 만들 없대요. 열정도 똑같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말하는 번아웃은 열정이 과하게 불타올라서 오는 건 아닐까요. 저 역시 최근에 번아웃을 겪은 사람으로서... 더 이상 열정이 예전만큼 못하다고 속상해하지 않으려고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불타올라 재가 되어 버리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며 담금질이 필요한 때니까 안심하라고요.


<자부심 강한 장인이 명품 칼을 만드는 과정>

https://youtu.be/c8VLLpyZLEU?t=391


8. 고기 뿐만 아니라 채소의 익힘 정도까지 세심하게 체크한다는 안성재 셰프. 저 역시 열정보다는 진정성으로 일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더 이상 처음처럼 활활 불타오르지는 않지만, 작품을 보는 눈은 더 또렷해지고 날카로워졌으니까요. 중요한 건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것보다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는 진정성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요. 직장생활 9년차, 저는 이렇게 정의해보겠습니다.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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