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약간의 남해 여행기와 2년간의 대학원 생활에 대한 다분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회고가 담겨있습니다. 괜스레 우울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하지만 끝까지 읽으셨을 때, 기분이 나쁜 글은 아니실 테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들어가며, 나는 왜 남해에 오게 되었는가
7월 입사를 앞둔 6월은 20대 인생의 마지막 방학으로 느껴졌다. 졸업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보고 싶었던 울산 친구들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6월을 시작했다. 집에서 실컷 쉬어도 보고, 울산에서 지내는 동안 만나기 어려웠던 친구들과도 만나 근황을 공유하며 약속과 휴식의 반복으로 부지런히 6월의 절반을 채웠다.
그러다 문득, 뭔가 조용히 혼자 일주일 정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에어비앤비로 숙소만 잡아두고 길을 나섰다. 남해에 도착한 첫날, 그러니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 나는 다랭이 마을의 한 카페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 정리라는 명분 하에 가만히 앉아서 노트북을 펼치고 멍을 때렸다.
‘비 온다더니..’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장마를 마중 나온 일정 치고는 썩 날씨가 괜찮았다. 역시나 인생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다. 그 비싼 기상청의 슈퍼 컴퓨터도 당장 코 앞의 날씨를 못 맞추는 것처럼. 나에게는 대학원이 그랬다.
대학원과 취준 기간을 거치며 몸과 정신이 많이 망가졌다. 살도 찌고 불면증에, 생활 습관도 많이 망가졌다. 먼 옛날이긴 하지만, 분명 학창 시절의 나는 교실 문을 제일 먼저 여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낄 정도로 나름 부지런한 학생이었는데.. 근데 지금 왜 이렇게 된 걸까? 이렇게 가다간 회사에서도 제 역할을 못할 것만 같은 걱정이 들었다.
복합적인 이유가 겹치긴 했지만, 회사와의 입사 시기 조율에서 내가 줄곧 7월 입사를 희망했던 이유도 나를 재정비할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는 완전히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나를 되돌아 보는 여행 아닌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갔던 UNIST와 IPD 연구실
내가 들어갔던 UNIST의 IPD 연구실은 디자인 학과에서 인기있는 연구실 중 하나였다. 제품 디자인과 HCI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국내에 몇 없는 랩이었고, 연구 실적도 뛰어나 자대생들도 인턴 과정을 거쳐 매년 몇 없는 TO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타대생이었던 내가 인턴도 거치지 않고 들어가기에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문제는 내가 대학원에 합격하고서야 연구실 TO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리 교수님과 랩장님을 통해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위와 같은 구체적인 사실을 미리 알아챌 수는 없었다. (아마 두 분도 안내할 수 없었던 입장이지 않았을까) 당시에 나는 다른 대안을 마련해두지 않았었다. 내가 유일하게 희망하던 랩실이었고 이곳에 떨어지면 취업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합격과 동시에 다른 랩에 가야 한다는 현실은 다분히 내게 충격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분했다. 타대생이었기 때문에 미리 알 수 없었던 정보 하나는 내 진로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래서 사실 나는 포기를 결심했었다. 합격 끝에 권유받은 다른 랩실은 자대에서 학부 연구생으로 있었던 랩의 지도 교수님의 분야와 동일했기에, 사실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족들과 한참 대학원 포기에 대해 의논하던 와중, 갑자기 교수님께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 TO 공백이 생겼고, 교수님들 간의 조율 끝에 IPD 랩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기뻤다. 내게 다시 운이 따르는구나. 이렇게 2월까지 남은 일정을 소화하고 3월부터 진짜 궁금하고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마치 로켓을 타기 직전 마냥 설렘과 의욕으로 가득했다.
마치 장마 예보처럼 내 장밋빛 미래를 함부로 예측했던 것. 그게 화근이었다. 2020년,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COVID-19 판데믹은 내 기대를 박살시키다 못해 나라는 존재를 뿌리째 흔들었다. 타대생으로서 낯선 환경, 기존 전공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분야, 연구와 논문이라는 심화 과정에 허덕이는 내게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변화들은 나를 무기력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인턴 기간을 거치지 못해 하나부터 열까지 학기 시작과 동시에 배우고 적응해도 모자란데, 입학과 기숙사 입사 연기와 전 수업 원격 수업, OT 취소 등등 어떻게든 나를 방해하려는 것들 뿐이었다. 이렇게 내 대학원 생활은 첫 단추부터 꼬여버렸다.
2020년 대학원 1년 차, 20대 인생 곡선의 바닥을 찍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갔다. 적응도 못한 채 조급함과 불안함이 가득했던 나는 수업과 연구 어느 토끼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연구를 배우기 위해 참여했던 연구실의 연구 프로젝트에 최대한 시간을 쏟았다. 1 저자가 진행하는 모든 작업들을 절반은 옆에서 그냥 지켜보고 절반은 보조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나마 연구 프로젝트의 큰 흐름과 간단한 스킬들을 익혔다. 2년 차에 내 연구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뼈대를 갖추는 것을 최우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타 수업이나 산학 과제 등에서는 제대로 된 학습도, 퍼포먼스도 낼 수 없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학우들 앞에서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자신과 존중을 잃었다. 이는 당연히 주변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에도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도 교수님은 내게 꽤나 실망을 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몇 번이나 미팅을 가졌지만, 교수님께 내 문제를 잘 설명해내지 못했고 교수님께서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공감할 수 없었다. 결국 나 혼자만의 문제였고 스스로 극복해야만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내 헬스 케어 센터를 방문했다. 코로나 초기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사회적인 활동이 금지되었고, 때문에 나는 학교에 이런 깊은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변수를 만들어야만 했다. 내부적인 요인으로 해결이 안 되니, 외부적인 요인이 간절했다. 여기서 외부 요인이라 함은 나 자신 밖의 요인이기도 하지만 연구실 밖의 요인이기도 하다. 그렇게 매주 상담을 받았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대로 털어놓았다. 이런 게 공황인가 싶을 정도로 경황이 없었던 나는 조급함에 약 처방까지 받았다. 하지만 한 번 먹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 이내 그만두었다. 약을 먹고 일시적이고 의존적으로 극복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꿈꾸던 대학원에 온 나는 20대 인생 곡선의 바닥을 찍을 정도로 최악을 경험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알아볼 정도였다. 이쯤부터 ‘너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라는 말을 종종 듣기 시작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2021년 대학원 2년 차, 회복과 체념 그 사이
그렇게 2021년 새해가 다가왔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1년, 그니까 석사의 절반이 지난 것이다. (석사는 진짜 금방이다) 인스타그램에 반성문을 하나 작성했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일부 털어놓고, 새해를 맞이해 다시 잘해보자라는 다짐이었다. 바닥을 찍었으니 올라갈 일만 남았겠다 싶었다. 주식에서 흔히 말하는 ‘기술적 반등’이 올 법했다. 너무 힘들었으니까.
코로나의 사회적인 적응이 어느 정도 진행된 2020년 말부터 2021년 즈음은 나름의 사회적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DINO라는 교내 메이킹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친구들도 사귀고, 내 연구팀을 꾸려 나만의 연구도 진행할 수 있었다. 날 괴롭히던 외부요인들이 하나둘 제거되면서, 다시 내가 대학원에 온 이유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연구적으로 나는 너무 초짜였고 내가 주도하는 연구에 스스로 확신이 없어 이리저리 중심이 많이 흔들리기도 했다. 이제 와서 한 번에 모든 걸 극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정도는 내려놓아야 했다. 잘하는 것보다 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IPD 랩의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 아이디어부터 최종 프로토타입까지 디자인과 개발을 직접 하고, 필드 스터디를 통해 본인이 디자인한 제품의 사용자와 그들의 경험을 직접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사실상 작은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겪는 프로세스와 유사하다. 사실 이 귀한 경험 자체를 해보고자 이 랩실을 그토록 희망했던 나였다. 그래서 그저 해내는 것에만 집중했고, 마침내 졸업 논문을 끝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마치며, 대학원을 고민 중인 사람들에게
코로나와 함께했던 지난 2년 간의 대학원 생활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힘들었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직까지도 독이 쌓인 몸과 정신에 고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마무리하면 혹시나 대학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당신이 대학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주변에 대학원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추천하는 편이기는 하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내가 대학원을 어떻게 결심하게 되었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내가 진로 고민이 한참이던 2018년, 미국에서 자신들만의 진로를 개척해 나간 실리콘밸리의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그들은 학업에 대한 시각이 남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A라는 전공으로 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이 되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 (취업)을 준비하게 된다. 특히, 어린 나이가 왜인지 모르게 커리어에 일종의 가산점 역할을 하는 한국에서는 최대한 공백 없이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이런 생각에 갇혀있었고, 해가 지날 때마다 내 진로에 대한 확신은 없는데 사회로 떠밀리는 것만 같아 조급함만 가득해졌다. 반면에,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학업 과정을 일종의 탐구 과정으로 대했다. 만약, 4년제 대학에서 A라는 전공을 탐구해보고 본인과 맞지 않으면 B, C 전공을 탐구하러 떠난다. 이때 다음 탐구 과정은 복수 전공이 될 수도, 다른 4년제 대학이 될 수도, 혹은 대학원이 될 수도 있다. 마치 게임 속 미니맵의 어두운 부분을 하나씩 밝혀보는 것처럼.
그들로부터 배운 점을 내 인생에 적용해본 끝에 나는 대학원을 선택했다. 당시 내 진로 목표는 하드웨어 UX 직군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이었고, 기계공학과 디자인 엔지니어링 융합 전공으로는 아직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고 일을 시작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상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하드웨어를 직접 기획부터 디자인, 설계하고 그 사용자 경험을 연구할 수 있는 대학원과 연구실을 가기로 결심했고, 졸업 후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었어도 2년 전 나의 선택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오히려 당신이 어떤 상위 레벨의 목표가 있고 대학원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라면, 강력 추천하고 싶다. 분명 어떤 형태로든 그 경험은 당신 삶에 도움이 될 것이다.